- 연평도 포격 다음 날 쓴 한국과 미국을 비교하는 글입니다. 정확히 8년 전이네요. 저는 이때보다 훨씬 개인주의적이며, 예전만큼 미국을 고평가하지도 않고, 한 국가의 방향성에 대해 국민성과 같은 모호한 개념으로 설명하려는 무리수를 더 이상 시도하지 않습니다. 또한 한국이라는 국가는 그 지정학적 불리함에도 불구하고 제법 최선을 다한 점도 있다고 보며, 뒤에 언급하는 한국인들의 '일련의 포기'에도 합리적인 이유가 있었다고 판단합니다. 물론 여전히 일부 관점은 유효합니다만 공격이 들어온다면 그 관점은 폐기했다고 피할 생각입니다. 그러니 그냥 재미로만 읽어주시기 바랍니다.
미국 극복하기
읽기도 전에 김 빠지는 소리다만 확신하건대 이 글의 재산적 가치란 전무할 것이다. 내가 경험한 미국이란 카투사 생활 2년과 1달 간의 짧은 여행이 전부이다. 당장 내 핸드폰에도 미국에서 10년 이상 수학한 친구들이 널려있다. 물론 고향 밖으로 한 발자국도 나가지 않았으나 우주를 논한 칸트나, 정작 일본을 방문해본 적 없는 루스 베네딕트의 <국화와 칼>이 일본 연구 서적의 최고봉으로 꼽히는 경우도 있다만 그런 희대의 천재들과 나를 비교하는 것은 서른 전에 10억을 모으겠다는 것 이상의 허세다.
게다가 나는 고작 이십대 중반의, 무언가의 원인을 분석하기에는 지나치게 젊은 사람 아닌다.
그럼에도 이 글을 쓰는 것은, 개인주의자로 살기로 결심했음에도 불구하고 마음 속에 끓어오르는 어떤 답답함이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어제 사건(자기가 쓴 글에 역주 : 연평도 포격을 말함)이다. 무언가 잘못되어 있다. 그것을 말하는 데에 있어, 내게는 한국과 미국을 비교하는 것이 가장 쉬운 방법이다. '미국과 비교해' 무언가 분명 잘못되어 있다.
그 '잘못됨'은 이번 여름 참가한 공정거래위원회 모의 경연 대회에서도 이미 느낀 바 있다. 국무총리상이 걸리고 입상 시 변호사 모집 경쟁률만 100대 1이 넘는 공정거래위원회에 임관하는 데에 도움이 되는 이 대회에 참가한 젊은이들의 면면은 실로 화려하기 그지 없다. 그런데 대회 시작 전 국기에 대한 경례(정부 주도 대회다)가 있자 여기 저기서 비웃음 소리가 터져 나오던 것이다. 뭐 이런 데까지 와서 국민 의례나 하고 있냐는 그런 분위기였던 것이다.
나는 지독히도 인상적으로 보았던 어떤 과거를 떠올릴 수 밖에 없었다. 중학교 3학년 여름 방학, 나는 한 달 간 미국 캘리포니아의 승마 캠프에 참가한 적이 있다. 참가자 연령은 8살부터 14살이었으니 말 그대로 꼬맹이들 캠프였다. 그런데 그 캠프는 그 꼬맹이들에게 매일 아침과 저녁, 국기 계양식과 하강식을 참석시켰다. 내가 아는 개인주의적 서구와는 너무나도 다른 장면이라 어리둥절 할 수 밖에 없었다.
물론 한국에서도 그런 건 수없이 시킨다. 그런데 한국에서 그런 세레모니가 있으면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다 실실 쪼개며 건성으로 참여하는 게 상식이다. 그런 행사에 진지한 얼굴로 참가하면 바보 취급 당하니깐.
하지만 미국 꼬맹이들은 그렇지 않았다. 8살 짜리부터, 벌써 어른과 잘 구별이 안되는 만 14살 먹은 놈들까지 빠짐 없이 국가를 열창했다. 성조기는 캠프 참가자들 전원이 매일 돌아가며 바꿔 달았는데, 성조기를 접는 것도, 다는 것도 다들 너무나 능숙했다.
이런 것은 후일 군 복무 시절 지겹도록 보았다. 미 8군에서 군 복무를 하며 군 행사 뿐 아니라 민간 행사에도 여러 차례 그 따라부르기도 어려운 미국 국가가 연주되는 것을 들었는데, 나는 미국인들이 한국인들처럼 성의 없이 국가를 부르는 것을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다.
애국심이 과연 인간에게 필요한 덕목인지, 오스카 와일드가 일갈한 것처럼 도덕적으로 내세울 것 없는 자의 미덕에 불과한 것인지는 알 수 없다. 그것은 내가 논할 수 없는 내용이니까. 다만 그 전제와 별도로 내가 미국이라는 나라에서 느낀 것은, 이 나라의 시민들이 매우 애국적이고 집단적이라는 사실이다. 그리고 감히 판단하건대 이것은 우리가 알고 있는 그 어떤 것보다도 미국이 강대한 원천적 이유이다.
그들은 인종적 다양성을 바탕으로 성장하지 않았다. 미국의 경제성장률은 백인 우월주의가 횡행하던 시점에 가장 높았다.
그들은 개인주의적이지 않다. 그저 똥군기를 잡지 않을 뿐이다. 매카시즘의 열풍은 1960년대의 단면만이 아니다. 일본차가 미국에게 잘 팔리기 시작하자 공개적으로 일본차를 부수는 것을 인증하는 시민들이 등장한 나라가 미국이다. 우리는 일본 군국주의의 가미카제에 대해서만 알고 있지만 태평양 전쟁에서 맨 처음 자폭 공격을 시작한 것은 폭탄을 몸에 두르고 적진에 뛰어든 20대 초반의 미 해병대원들이다.
그들은 원래 평등한 것을 싫어한다. 저 패튼 장군의 마초적인 연설에 나오듯 그들에게는 승자를 숭상하는 문화가 있으며, 몇 대 째 이어지는 금융재벌들이 국가의 패권을 쥐고 있고 우리가 알고 있는 빌 게이츠 같은 자들 역시도 그들의 돈이 없었다면 성공할 수 없었다.
한 나라가 가진 역량을 한 문장으로 설명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한 문장으로 요약한다면 미국이라는 나라가 가진 힘의 원천은 저 위에 언급한 실체 불분명한 것들이 아니라, 바로 집단적 호전성과 이에 대한 높은 자부심이다. 이쯤되면 읽던 사람은 웬 젊은 꼴통이 등장했냐고 탄식할지 모른다만 내가 느끼는 한국과의 결정적 차이, 즉 '잘못됨'은 여기 어딘가서 비롯되는 것이다.
물론 군대 문화하면 한국이다. 대단히 집단적이다. 하지만 우습게도 그 호전성은 대외에 투사되는 것이 아니라, 한 살이라도 더 먹으면 목숨 걸고 형 대접을 받으려는 것처럼, 그 내부적인 '계급'을 지키는 데에만 반영된다. 반면 미국인들은 성적으로 자유 분방하며 나이 지긋한 대학 교수가 젊은 청소부와 어깨 동무를 할 정도로 빠져 있는 것 같지만 대외적으로는 매우 강경하고 엄격하다. 그것은 최근의 통계를 보아도 드러난다. 미국인들의 90%는 조국을 자랑스럽다고 말하며 전쟁이 나면 언제든 기꺼이 나가 싸우겠다고 응답한다. 그리고 실제로 그들은 그래왔다. 한국은 20%에도 미치지 못한다. 하지만 아마 자기보다 못하다고 생각한 사람이 돈을 더 벌었거나 자기한테 찍찍 반말을 한다면 목숨 걸고 싸우겠다는 사람의 비율은 80%가 넘을 것이다. 어제 일어난 같은 사건에 대처할만한 역량이 없는 한심함은 바로 이런 데에서 비롯된다. 사회를 이끄는 엘리트 계급도 기층을 이루는 대중 계급도 모두 마찬가지다.
원래 한국 고위층에게 노블리스 오블리제가 없는 것은 따로 더 언급할 필요도 없을만큼 자명하다만, 젊은 세대는 더 심각하다. 나는 그래도 메이져 대학의 끄트머리를 나왔고 카투사와 로스쿨을 거치며 이른바 한국을 책임질 수많은 젊은 엘리트들을 눈 앞에서 관찰했다. 그리고 그들이 주축이 되는 세대에 희망이 없을 것이라는 인상을 받았다.
하류 계급으로 전락할 사람들의 국가관은 더하다. 미국에서 교육 받지 못한 계층은 의외로 親정부적이다. 흔히 white trash, red neck이라고 불리는 백인 계층들이 보수적인 공화당을 지지한다는 것은 널리 알려진 일이다. 반면 한국의 일반 대중들은 왜 사회가 이렇게 굴러가는가에 대한 기본적인 통찰도 없이 그저 정부를 욕하는 게 자각있는 행동이라고 착각한다. 어차피 냉철한 비판을 할 소양이 안 된다면 그래도 국가의 정책을 따르는 것이 공동체적 관점에서 조금이나마 도움이 될 텐데, 어디서 주워들은 것만 많아서 자신들을 지식인 대우해주지 않는 것에 불만을 품다니 이게 얼마나 웃긴 일인가. 한국인은 부정적인 쪽으로만 그 집단성을 발전시켜왔다. 응당 존중해야할 공동체적 가치 앞에서는 한 없이 이기적이고 개인주의적인 것이 바로 한국인들이다.
국민 의례의 단어가 다소 파시즘적인 건 사실이다. 하지만 미국이나 프랑스 국가의 가사에 비하면 대단히 양호하다. 여하간 대외적인 위험이 있는데 개인의 목숨을 들고 충성하지 않으면 다 노예가 되는 수 밖에 없다. 그것이 바로 헌법이 생명권을 제한하는 이유인 것이다. 따라서 나는 국민 의례를 읊을 때마다, 집단주의의 횡행을 경계하고 생명권이 제한 받는 최악의 상황이 발생하지 않게 미리 노력해야 한다는 자각을 주문해야 한다고 생각하지 그 문구 자체가 잘못되었다고 판단하지 않는다. 지금 같은 싸늘한 냉소는 심각한 문제가 있다. 혹자는 운동 경기에 대한 국민들의 관심을 반례로 들며 한국인이 애국적이라고 말할지 모른다만 그것은 개선될 수 없는 개인의 삶에 대한 탈출구로서 대리만족에 불과하다고 본다. 유럽처럼 지역 연고의 스포츠가 발달하지 않아서 나타나는 현상일 뿐, 애국심이라고 평가하기는 어렵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누가 주체인지는 모르겠지만, 언론은 정치적 올바름 따위를 내세우며 갈수록 한국에게 북유럽과 같은 나라가 되기를 갈수록 주문하는 듯 하다. 내 생각은 분명히 다르다. 소국으로서 한국이 추구해야 하는 국가는 스위스나 이스라엘이지 북유럽이 아니다.
지도를 보고 우리 주위에 어떤 나라들이 있는지, 이 땅 안에 제대로 생산되는 자원이라도 있는지, 중국이든 일본이든 대한해협을 봉쇄했을 때 당장 '먹고 사는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지 한 번 자문해보기 바란다. 평화로운 시기에 살고 있기에 그것을 잊고 있는 것은 아닌가. 사람 4명 죽은 것이 메인 뉴스가 되었다는 것이야 말로 지극히 평화롭다는 증거이다.
사람의 목숨은 물론, 그 사람이 믿는 정치적 올바름조차도, 이질적 집단의 힘이 더 강하다면 그 조직화된 폭력 앞에서는 한없이 무력할 수 밖에 없다. 그 마하트마 간디의 비폭력 무저항조차도 그나마 표면적 인권국가인 영국을 대상으로 한 것이며, 인도가 더 이상 큰 이득이 되지 않는 그 시점, 일본 제국에게 영국 동양 함대가 궤멸된 사건과 타이밍이 맞아서 성공한 것일 뿐이다. 히틀러나 스탈린 앞에서 그런 운동을 했다고 생각해봐라. 원래 무슨 사건만 터지면 우수수 죽어나가는 게 인간 역사 본연의 모습이며 그것은 미래에도 바뀌지 않을 것이다.
지금 같이 시기가 일평생 유지가 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하지 않는다. 만약 러시아에 심각한 재난이 일어나 이들이 살기 위해 옆 나라를 침공해야 한고 그 시점 미국이 쇄락해 있다면 과연 북유럽 국가들은 일주일이라도 버틸 수 있을까? 이라크의 쿠웨이트 침공 직전, 쿠웨이트인들은 돈이 남아 돌아서 공중 화장실 변기를 금으로 만들었다. 그 대가로 그 국민들은 학살당하고 강간당했으며 삶의 터전은 황폐화되었다.
지금 우리가 사는 세상은 과거에 비해 전혀 특별하지 않다. 기술의 진보, 이성과 인권의 발달이 인간 사회를 야만과 단절시킨다는 생각이야 말로 완벽한 허구다. 인종·가치관·다양성이 존중받는 사회는 고래로부터 숱하게 존재해왔으며 그것은 결코 현대에 새롭게 등장한 것이 아니다. 그리고 역설적이게도, 그런 평화는 늘 군사적 안정 위에서만 존재해왔고, 피지배 계층의 희생(지금 서구 제 국가들이 행복하게 살 수 있는 것도 그들이 수백년간 누린 군사적 우위의 잔재로 제 3세계 어린 아이들이 저가에 노동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을 통해 이루어졌다.
사람들은 IMF를 소설이라고 말했다. 그 대가로 수많은 사람들이 생활고를 겪고 자살로 내몰렸다. 하지만 태반의 사람들은 왜 IMF가 찾아왔는지조차도 잘 모른다. 내가 보았을 때는 IMF와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끔찍할 일들이 내가 중년이 되기 전에 반드시 닥친다.
그렇다면 각 국가의 구성원이기에 앞서 각 국가에서 어떤 계급을 점하고 있는가로 사람을 그룹핑할 수 있다는 되도 않는 생각 따위는 빨리 던져 버리는 것이 좋다. 아예 국적을 바꾸고 나가 살 생각이 아니라면 말이다. 그것도 바꿀 생각이라면 빨리 바꾸어야지 극단적인 상황이 찾아오면 그들이 평소 무시하던 자국의 군대 이외에 그들을 지켜줄 사람들은 그 어디에도 없다. 그나마 영미를 비롯한 구 서구 열강들에게는 자신들은 백인이라는 유대감이라도 있지만 한중일 삼국에게는 그런 것조차도 기대할 수 없다.
어떤 개인도 국가라는 공동체와 유리되어 살 수는 없다. 그렇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살기 좋은 나라에서 태어난 바보일 뿐이다. 그 나라의 힘의 크기를 평가하는 일은 주변 국가들과의 비교를 통해서만 그 의미를 찾을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한국은 약소국이며 이 현실을 벗어나기 위해 무언가 특단의 조치를 취해야 한다는 것은 극단론이 아니다. 약소국의 시민으로서 차라리 돈을 모아서 이민을 갈 생각이라면 모르겠다만 이렇게 대책 없이 국가 대계를 무시하고 살 수 있다는 것을 이해할 수 없다.
이와 같은 행태라면 한국 정부와 한국인들은 추후 닥칠 위기 앞에 결속되지 않을 것이다. 전 세대와는 분명 다르다. 한국인들은 이미 급속도로 와해되고 있다.
이쯤에서 질문해본다. 왜 그런가? 혹자는 한국이라는 군사 정권과 폐쇄적인 교육 시스템에 대한 반동에서 원인을 찾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내가 생각하는 진짜 원인은 따로 있다. 고루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내가 판단하는 가장 근본적인 원인은 바로 역사를 바로 잡는 것에 실패했다는 것이다. 국가를 위해 희생한 사람이 대접받지 못하고, 비열하게 자국민을 배신하고 착취한 이들이 성공했다는 그 현실로 인해 눈부신 근대화에도 불구하고 사회에 국가 기관에 대한 불신이 만연하게 되었다.
한국 사회에서 '정의'란 정치가들의 프로파간다에나 존재하는 말이다. 그나마 우리 전 세대는, 그래도 절대적인 가난에서 한국을 탈피시켰던 그들의 수완을 존중했다. 그러나 거주지는 물론이고 시민권이라는 것조차도 선택의 대상이 되는 이 시대, 어린 시절부터 삼풍백화점이나 IMF로 대변되는 국가의 무능을 보아 온 젊은 세대가, 청산되지 못한 과거라는 태생적 원죄를 가지고 태어난 이들을 존중해줄 리 없다.
근현대사에 국한되는 이야기도 아니다. 임진왜란 당시 선조는 노비들이 던진 돌에 맞으며 서울을 떠났다. 한반도에서 때때로 국민이 자발적으로 응집할 수 있었던 것은 그들이 무지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국가의 지도층이 단 한 번도 국민의 희생에 합당한 모습을 보인 적이 없다는 그 누적된 역사 속에, 높은 문해율을 가진 세계에서 가장 교육 수준이 높은 나라 사람들이 더 이상 비합리적인 판단을 할 가능성은 없다.
미국은 반대다. 자국을 부도덕하다고 생각하는 미국인들은 있어도, 자국을 무능하다고 보는 미국인들은 없다. 의심할 여지 없이, 미국은 세계 초강대국이었고 일부 실수가 있다고 해도 결국 한 세대가 완전히 지나가기 전에는 그런 국민들의 실망을 만회할 한 방을 보여줬기 때문이다.
원체 강대국이었던 적이 없는지라, 엄연히 다른 나라 역사인 몽골사를 한국사와 동일시하려 들고, 정체불명의 위서인 환단고기를 믿으며 청나라 황실의 성씨 아이신기오르를 한자로 음차한 애신각라(愛新覺羅)가 '신라를 사랑하고 존중함' 이라는 정신 나간 주장을 하는 게 이 나라 사람들의 꼴 사나운 열등감이라면, 그렇게 구차할 것 없이 세계 초강대국 국민으로 태어났다는 것 자체가 그들에게 어떤 자부심을 안겨줄지 상상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그런 자부심은 국가에 권위를 더하며 위기 시에 국민의 자발적 참여와 자신감을 이끌어낸다. 그것은 부유하고 책임감 있는 아버지가 낡은 책을 꺼내며, 이게 우리 집안의 가훈이라고 말할 때와 가산을 탕진하고 멀리 외국으로 도피했다 집안에 돌아온 아버지가 똑같은 말을 할 때, 그 말이 가진 무게감의 차이와 같다.
미국은 강하다.
통상 지적 수준이 높고 소득이 클수록 이 사실을 명확히 인지하고 있는 경우가 많다. 도대체 어떻게 저런 국가가 존재하고 있는지 모르겠다고 말하는 사람도 많이 봤다.
미국인으로 태어났다는 것은 중세 시대에 영주로 태어난 것과 같다. 그들은 지금도 세계 각지에서 예전 귀족들이 받던 대우 이상의 것을 받으며 살고 있다. 그들 중 가장 비천한 자라도 다른 나라에서 영어 강사를 하며 그 나라의 평균적인 시민 이상으로 소득을 올릴 수 있다. 반면 한국인으로 태어났다는 것은 이제 제법 돈은 많지만 지배층에게 잘못 보이면 언제든 재산 몰수를 당할 수 있는 뼈대 없는 신흥 장사치 정도의 자리를 점하고 있다고 이해함이 옳다. 그 현실은 명확히 직시하는 것이 좋다.
그 근원적 차이는 어디서 비롯된 것일까? 물론 지리적 차이를 포함해 수 많은 이유가 있을 것이다.
그러나 내가 꼽는 것은 다시 말하지만 그들이 가진 내재적 호전성이다. 그것이 똑같이 큰 영토를 가졌지만 지역강국으로도 성장하지 못한 브라질이나 멕시코와 미국의 차이이다. 표면적인 가치와 달리 내가 보아온 미국의 진정한 국혼, 즉 국가를 이끄는 정치 엘리트들의 머리 속을 꽉 잡고 있는 것은 바로 거들먹거리던 커스터 장군과 알라모 요새에서 모든 수비대원들이 전멸할 때까지 멕시코 군과 싸운 데이빗 크로켓의 그것과 동일하다. 명분 없는 침략 전쟁에도 그들은 자기가 속한 집단의 이익을 위해 목숨을 바쳤다. 그들의 Menifesto Destiny는 변한 적이 없다.
본래 앵글로 색슨은 북방의 야만족 중에서도 가장 거친 무리들이었다. 그들은 전쟁을 두려워하지 않았기에 광대한 대륙을 손에 넣을 수 있었고, 군인들의 피로 세계 경제의 독점적 지위를 획득하였으며, 핵 전쟁의 위험을 감수하고 벌인 군비 경쟁에서 승리해 소련을 붕괴시켰다.
덕분에 그들은 아주 간단히 전 세계에 US Standard를 강요하며 살 수 있게 되었다. 지금 미국인들은 전 세계 모든 나라를 합친 것보다도 더 많은 공해를 배출하며 미국 어린이는 1년 동안 같은 나이 대의 아이티 어린이보다 250배 정도 더 생태계에 해로운 물질을 배출한다. 그러나 그들은 그런 자국을 자랑스러워하며 자유 분방하게 살아간다.
국가를 위해 죽는 것은 분명 개인으로서는 개죽음이다. 그 논리적 판단은 부정할 수 없다. 그래서 한국인들은 결코 도전하지 않았다. 윤관이 쌓은 9성을 그대로 돌려주었고, 위화도에서 회군을 하였으며, 북벌을 추진하던 효종은 독살당했다. 앞으로 중국이 청천강 이북 또는 북한 전역에 대한 영유권을 주장했을 때, 전쟁을 각오할 국민이 있을지 모르겠다.
그리고 그 안전함의 대가로 우리는 좁은 땅에서 아주 어린 나이부터 경쟁에 내몰리며, 본토에서는 패배자 취급을 받는 미국인들에게도 업신여김을 당하며 살아간다.
당연하지만 이 역시도 논리적으로 억울해할 일이 아니다. 빈부격차의 주 원인은 상속인데, 돈보다 훨씬 소중한, 자기 자신의 목숨을 공동체의 확장을 위해(다시 말하지만 방어가 아니다) 바칠 수 있던 사람들이 많은 나라의 후손들이 더 많은 대우를 받는 것은 당연하지 않은가. 어차피 한국 사람 말고는 아무도 못 읽는 글이나 싸지르는 먹물들(생산성 없는 법조인이 용 대접을 받았고 과학자들은 천대 받았다)보다, 군인(정치 군인 말고)이나 소방관들을 존중하는 문화가 뿌리내린 그 사회가 공동체의 강건함을 누적시킨다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다. 이 같은 불평등은 대단히 합리적이며, 어제 사건에 대한 자칭 진보라고 말하는 일부 언론들의 매국적인 날조 기사를 보면 그 논리필연적인 차이가 더 벌어질 수 밖에 없음을 절감하게 되었다.
어제 사건에서 보듯 앞으로도 불행한 역사는 반복될 것이다. 무능한 정부와, 불신하는 국민 그 양자의 부조화가 끊임 없이 순환하며 우리는 지금 이 위치를 고수하는 데에도 버거움을 느낄 것이다. 민족성이란 그렇게 쉽게 변하는 것이 아니다.
자 결론을 내자.
나는 애국자가 아니다. 나는 한국이 싫다. 하지만 좋든 싫든 나는 예비 법조인으로서 이 나라에서 사는 수 밖에 없다. 내가 의사나 공학도라면 해외에서 살 기회도 있겠지만 한국 법조인이 미국에서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이 있겠나. 나는 이민 1세대로서 식료품 장사를 할 용기는 없다. 또한 나는 뼛 속까지 반미주의자이기도 하다. 따라서 어쩔 수 없는 내 현실과, 미국에 대한 혐오가 이 모든 연구를 시작하게 되는 동기이다. 물론 한 국가의 소시민으로서 내 모든 행동이란 개인의 사유에 그치고 말겠으나, 내 나름대로 미국이라는 국가를 극복하기 위한 일련의 계획을 세우고 비슷한 생각을 가진 사람들에게 어떠한 방향성을 제시해서 조금이라도 변화를 이끌어 내고자 한다.
일단은 먼저 개인적으로, 내 인격과 가치관에 적잖은 영향을 끼친 이 거대한 국가를 더 잘 알아보고 그들의 약점을 찾아볼 생각이다. 미국 전사(戰史)에서 미군에게 최대한의 인명 손실을 강제했던 자들은, 서구에 대한 반동으로 아시아적 가치를 필요 이상으로 고평가한, 옥시덴탈리즘에 찌들어 있던 일본 육사 출신의 사무라이들이 아니라 바로 미국 유학파 출신의 야마모토 이소로쿠와 쿠리바야시 타다미치였다.
나는 미국 유학파 출신은 아니지만 할 수 있는 선에서 이들의 언어를 가능한 능숙하게 구사할 계획이며, 이 나라의 여자들도 최대한 많이 만나볼 생각이다.
이 모든 일련의 과정을 <미국 극복하기>로 명명한다.
- 2010년 11월 24일
한줄 한줄 정독했습니다. 혹시 내 분신이 썼는줄 알았습니다^^;; 생각이 너무 똑같아서 한 말이니 불쾌해 하지는 말아주셨으면 합니다.
한국인과 한국이 처한 지정학적 현실을 보는 눈이 저와 똑같습니다... 비슷한게 아니라 똑같습니다.
강대국은 자신들이 누구인지를 정의하는 공통의 가치관이 있습니다.
펠로폰네소스전쟁사에 나오는 아테네인은 배만 있으면 바다를 따라 어디든지 가는 외향적인 사람들입니다. 비긴 전쟁은 졌다고 생각할 정도로 승리를 당연히 여기는 사람들이고 위험을 무릅쓰고 뭔가를 쟁취하지 않는 것을 수치스러워 하는 사람들입니다.
처칠이 말한 영국인은 완전히 희망이 없어보이는 전쟁에서 타협을 하느니 자기가 흘린 피에 쓰러져 죽기를 바라는 불굴의 용기를 가진 사람들입니다. 자신의 나라와 자신의 나라가 상징하는 것이 승리할 때 까지 바다에서, 하늘에서, 땅에서, 영국이 함락된다면 신대륙으로 가서라도 싸울 의지를 가진 인간들입니다.
위 내러티브가 완전히 사실이라는게 아닙니다. 국가에는 국민을 하나로 묶는 소속감과 용기가 있어야 한다는 뜻이겠죠.
패권국만 아니라 모든 나라에는 이런 것이 필요합니다. 이해관계를 넘어 서로를 결속실킬 우리가 누군가에 대한 정의와 소속감 말입니다.
한국인이 누구인가요? 무엇이 한국인을 정의내리고 서로를 믿고 의지하게 하고, 최종적으로 어려움이 닥쳤을 때 도망가기보다 싸울 용기를 내게 할까요?
@admljy19 님도 느끼셨겠지만 이제 평화로운 시기가 끝나고 한치 앞을 보기 힘든 혼란이 오는 것 같습니다. 이런 역략을 헤쳐가기에는 한국인의 마음은 너무 병들지 않았나 생각이 듭니다.
그런 게 없고 과연 인공적으로 만들 수 있는 것일까 늘 의문이 드네요 ㅎㅎ 반만년 역사라는 왜곡된 교육을 가르칠 것이 아니라, 자국군이 전멸한 마사다 요새를 관람시키는 이스라엘 육사처럼, 과거의 역사에서 반성할 것은 반성하고 다시는 이런 일이 반복되지 않도록 다시 출발해야 한다고 강조해야할 것인데... 왜곡된 국정교과서도, 어설픈 이상주의에 입각한 자칭 진보라는 사람들의 편향된 현실 인식도 모두 문제가 많네요
갑자기 문호를 열고 전쟁을 겪고 경제 개발을 한 그 급박한 변화의 과정에 중심을 세워줄 어떤 철학이 없어서 그런 게 아닐까 싶습니다. 결국은 그 철학의 부재가 젊은 지식인들을 주사파로 만들었고 작금에는 물질만능주의에 찌들게 했죠
사람 사는 세상은 다 어디나 비슷하다지만, 지금 한국인들의 정신 세계는 참으로 암담한 것 같습니다, 병들었다... 그 표현에 깊이 동감합니다
읽어주셔서, 그리고 동질감을 느껴주셔서 감사합닙다
감상평을 쓸 수 없을 정도의 글입니다. 몇 마디 말로 평가하거나 공감하거나 반대하기가 싫으네요. 멋진 글 자주 올려 주세요~ 가즈앗!!! ㅋ
ㅎㅎ 좋은 평가 감사드립니다
무더운 날 몸 관리 잘 하시기 바랍니다
가즈앗~ !! ㅋㅋ
훌륭한 글 잘 읽었습니다.
이런 글을 읽을 수 있어서 역시 스팀잇 하길 잘 했다는 생각이 듦니다^^
영광입니다 ㅎㅎ
좋은글에는 항상 인기있기 마련입니다.^^
필명이 마이너리티리포트셨네요
간지 후덜덜
좋은 글 읽게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 보다 올곧고 정확한 시각에 감사합니다.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올곧고 정확한 시각인지는 알 수 없지만요 ^^;
다 남겨진 글에는 어떤 식으로든 의미가 있겠죠
정말 우리가 진지하게 고민해야할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올바른 역사를 세우지 못한 후과가 이렇게 크군요.
지금이라도 우리 모두 정신을 차려야 하겠습니다
그게 경제발전보다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지금 한국이 이룬 경제 발전이야 추후 중국에게 다시 자리를 뺏길 생각을 불과 50년 짜리였을지도 모르지만 역사 청산은 500년 아니 그 이상 짜리니까요... 그래서 결국 다시 자본주의와 빈부격차로 가는 베트남이 한국보다 훨씬 바람직하게 성장해온 국가라고 판단해요
사람들이 공동체를 위해 희생하면 손해를 본다는 인식이 만연한 사회에서 무슨 바람직한 미래를 볼 수 있겠습니까... ㅎㅎ 지금이라도 과거를 덮을 게 아니라, 자국군이 전멸한 마사다 요새에서 다시는 이런 일을 만들지 않겠다고 선언하는 이스라엘 육사 생도들처럼 오히려 그것을 직시하고 지금부터라도 바뀌겠다고 선언해야할텐데요...
좋은 글 잘 읽고 갑니다.
오랜만에 뵙네요 ㅎㅎ
읽어주셔서 감사드립니다~!!
다시 한번 아니 몇번을 읽게 만들어 주시네요!!!
감사히 잘 읽었습니다~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
좀 더 어릴 때 쓴 거라 다소 극단적인 시각은 있는 부분은 양해해주시기 바랍니다 ㅎㅎ
Good job