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세대에서 위닝 일레븐이라는 게임이 가졌던 위상은 다른 세대의 당구나 스타크래프트와 준하거나 또는 그 이상일 것이다.
이 게임은 유전자를 타는 게임이다. 당구나 스타크래프트는 정석대로 연습을 하면 연습량에 비례해서 실력이 올라가는 구간이 꽤 길지만 위닝 일레븐은 아주 초보 단계만 벗어나면 그닥 플레이 시간과 실력이 비례하지 않는다. 친한 친구랑 도서관에서 공부하다가 짬을 내 위닝일레븐을 하러 플스방에 가던 게 우리 세대의 흔한 모습이었는데 1년 내내 똑같은 시간 게임을 같이 해도 이기는 놈은 계속 이기고 지는 놈은 계속 진다. 축구공은 둥글고, 그래서 축구 게임이라 단판 기준으로는 가끔 잘 하는 사람이 지는 경우가 오히려 많이 나오지만 오판삼승 누적으로는 안 되는 사람은 절대 안 되는 그런 게임이다.
나는 고등학교 때부터 이 게임을 했는데 비슷한 시기에 함께 시작한 친구가 있다. 재능이 월등했던 이 친구는 집에 플레이스테이션을 보유한지 근 십년이 된 녀석들을 다 재치고 금세 고수가 되었다. 나중에는 게임 방송에도 몇 번 나오더라. 당시 게임을 시작한지 고작 3개월 지난 시점에 이 친구가 이 게임의 특징과 주의 사항을 간파하고 나에게 말해주었던 조언들이 있다. 당시에는 잘 이해하지 못했고 시간이 지나며 조금씩 이해하게 되었다. 시리즈를 거듭해도 이 게임에는 어떤 특징이 있으니까. 그리고 그 조언 중 하나는 15년이나 지난 어제 집에서 혼자 위닝을 하다가 깨우치게 되었다. 마치 무림 비급을 읊조리고 죽은 스승의 가르침을 한참 뒤에나 이해하는 수준 정도 될려나.
나는 농담이 아니라 이 친구와 위닝을 하다가 연패를 해서 절교했다. 아마 게임 때문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공부 같은 것은 열심히 하지 않아도 늘 전교 1등을 하던 그 모습, 수능 전날 플스방에서 자정까지 게임을 하고도 탑티어 의대에 들어간 이 친구의 존재가 아마 내 어딘가를 찔렀겠지. 이 친구 눈에, 자기보다 두뇌가 훨씬 떨어지는 인간들이 변별력을 주겠다고 고심해 만든 수능시험지는 얼마나 허접하게 보였을가. 출제자의 의도도, 내가 드리블이나 슛을 할 방향도 훤히 꿰고 있었을 것이다.
절교를 해버린 탓에 후일 다시 위닝을 붙어보지 못해서 아쉽다. 나는 위닝이라는 게임을 꽤 좋아했는데, 그것은 내가 썩 재능이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대학교 과탑이나 군대 소대탑, 로스쿨 기수탑 정도 할 실력은 되었기 때문이다. 어느 시점부터 나보다 위닝을 잘 하는 사람은 일부러 구하지 않는 이상은 꽤 만나기 어려웠다. 옛날에는 8:0이나 9:0으로 져본 적도 있는 무슨 벽처럼 느껴지던 사람들과 다시 만나 게임을 하면 내가 훨씬 더 잘 하는 것으로 뒤바뀌어 있는 경우가 많았다. 한 번 그렇게 뒤집으면 대부분 그 이후에도 내가 쭉 이겼다. 아마 내 인생에서, 재능이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연습량(게임을 그렇게 많이한 게 자랑인가는 별론으로 하고)으로 그렇게까지 올라갈 수 있었던 것은 위닝일레븐이 유일할지도 모른다.
나는 의외로 지금 직업에서 선방하고 있다. 어쩌면 나는 내가 잘할 수 있는 길을 선택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실은 그런 길을 택한 것이 아니라고 해도, 둔재가 나름 동네 고수 정도는 할 수 있던 위닝일레븐을 떠올리며 용기를 가질 때가 많다. 고작 게임이라고 하지만 밥 먹듯 이 게임을 하는 넓은 풀에서 어쨌든 열심히 해 상위권까지 올라 간 사례가 있으니까. 하지만 한편으로는 무려 15년 뒤에야 이해할 수 있던 그 친구의 말을 떠올리며, 타고난 재능이라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절감하기도 한다.
절교한 그 친구와 다시 위닝일레븐을 해볼 수 있다면 참 좋을 것이다. 아마 십중팔구 내가 지겠지만 그래도 해볼 수 있었다면 참 좋을 것이다. 여전히 느껴지는 벽에 타고난 재능의 절대적인 힘을 느끼던, 의외로 작아진 격차에 세월과 인간의 덧없음을 느끼든, 어느 쪽이든 느끼는 점이 있을텐데.
인생이란 원래 그런 것이다.
매우 공감가는 글이네요. 위닝이란 게임이 참... 그리고 그에 파생된 여러가지 관점들까지.
@tipu cur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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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합니다 ㅎㅎㅎ
한번 풋살이나 플스방에서 또 뭉쳐야 하는데 ㅋㅋㅋ
^^
보팅 감사드립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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