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는 사람은 다 알지만 나는 오로지 한국에서만 공부했다. 따라서 20대 중반 무렵에 이국으로 떠난 청춘들이 무엇을 겪었는지는 다만 추측해 볼 수 있을 따름이다. 나의 추측은 '언어'를 중심에 놓는 학문 분야에 국한된다. 곧 literature(문필)가 핵심이 되는 분야, 문학이나 철학 등이 그 대상이다.
사실 유학을 갈 정도라면 나름 해당 분야에서 내노라할 능력을 보유했다고 보아도 무방할 것이다. 그런데 유학 길에 오르면, 가장 먼저 짓누르는 것이 언어의 무게이다. 생활(생존)에도 교습에도 꼭 필요한 수단인 해당 외국어. 물론 한국에서 열심히 언어를 익혔겠지만, 원어민 수준에는 한참 못 미친다. 이 지점에서 매일매일 확인하게 되는 사실(!)은 "난 바보 아닌가, 말도 못하다니"라는 압박이다. 한국어로는 능숙능란하게 자기 의견과 주장을 펼칠 수 있었는데, 이 외국어로는 다 표현이 안 된다. 생각은 앞서 가는데, 소통은 자꾸 막힌다. 몇 달이 될지 몇 년이 될지 편차가 있겠지만, 얼마의 시간이 지나면, 대략 해당 언어를 따라잡을 수 있게 된다. 이게 안 되는 경우도 많다고 들었다. 아무튼 나는 그 사이 시간에 어떤 일이 벌어질지 무척 궁금하다. 아마도 정신의 재편이 일어날 것 같다.
좌절감과 자괴감을 일정 시간 겪게 되면 그것이 자아의 일부가 되기 마련이다. 그게 '습관'의 문제다. 일정 회수가 반복되면 자연스레 습관이 만들어지는 법. 나는 이 와중에 만들어진 습관이 좋지 않은 경향성을 띠게 되지 않을까 추측해 본다. 가령 열등감. 능력의 차이에 대한 반복된 확인만큼 사람을 주눅들게 만드는 일은 없다. 그리고 이 때 겪은 일들이 자아의 일부로 형성된 채 박사학위를 받고 귀국길에 오른다. 이 경우 한국 대학에서 가르치는 위치에 섰을 때 (즉 교수로 취직했을 때) 어떤 태도로 자기 전공을 학생들에게 가르치게 될까? 자신의 최종 학위 수여국이 어떤 무게로 다가올까?
더 오래 전, 유학이 드물었던 시절에는 아마 이런 경향이 더 강했을 것 같다. 당시 한국은 확실히 후진국이었으니, 젊은 나이에 문화 충격도 상당했을 거고. 이런 사정 아래서 20세기 후반(식민지 시절인 20세기 전반에 대립되는)의 한국 대학 제도가 정착되었을 것이다. 나는 이런 부분이 한국에서 학문이 독립하지 못한 채 종속적인 경향을 보이게 된 원인의 중요한 바탕 원인이라고 가설을 세워 본다. 자신의 학술 활동을 해당 언어라는 족쇄에 가두었으니 독자적이고 자율적인 학술 활동을 해 볼 엄두가 나지 않은 것은 아닐까?
이런 가설은 과거를 향해 있다. 지금은 분명 완전히 다른 학술 행위가 필요한 때이다. 따라서 미래를 향한 말도 보태야 마땅하리라. 나는 이 문제는 나중으로 미루고 싶다. 다만, 지금으로서는, 유학 생활이 정신을 노예로 만드는 것은 아닌지, 아니었는지, 물어보고 싶을 따름이다.
아울러 유학을 가지 않았다거나, 이른바 "전통" 학문을 한국 내에서 수련했다고 해서 그 자체로 자유로운 학술 행위를 하고 있다거나 할 수 있다는 것이 보장되지는 않는다는 걸 분명히 하고 싶다. 나는 그런 류의 "국수주의자"(국뽕)를 너무 많이 보았다. 이른바 "우리 것"을 말하려고 하는 이들 중에 그 정체 모호한 "우리 것"이건 괴물 같은 모습을 한 "서구의 것"이건 제대로 공부하고서 말한 이를 못 보았다(김용옥 같은 이가 대표적 반면교사라고 본다). 우리는 아무리 해도 서양 것을 절대 따라잡을 수 없으니 뭐라도 저들이 모르고 신기해 하는 동양 것을 저들에게 들이밀어 승부해야 한다는 저 철두철미 노예들은 애시당초 고려하지도 말기로 하자.
스스로 홍보하는 프로젝트에서 나왔습니다.
오늘도 좋은글 잘 읽었습니다.
오늘도 여러분들의 꾸준한 포스팅을 응원합니다.
도올이 하버드 졸업하기도 했고, 동서양 철학 두루 아는 사람 정도로 생각했는데 반면교사라 하시니 제가 아직 많이 모르는 것 같습니다.
교사는 누가 있을까요? 못 보았다고 하셨지만, 그나마 누가 있을까요.
도올은 서양철학에 대해 거의 알지 못합니다.
좀 심하게 말하면 학부생 수준이라고 해도 좋겠고요.
미국 식 교과서에 요약된 걸 알고 있다고 보면 됩니다.
해외박사를 자라는 저에게 와닿는 글이군요...
좋은 글입니다...
힘든 과정 헤치고 학업에 성취 있기를 기원합니다.
샘의 가설 흥미롭습니다!!!
공감합니다 100퍼센트
학계뿐만 아니라 정치계 또는 관계에서도 어느 특정 국가에서 유학 갔다온 사람들이 서로 똘똘 뭉쳐 그저 그 나라의 제도와 문화가 최고인양 떠들어대는 사람도 많지요
실제로 그 나라 언어 소통의 좌절감과 자괴감을 보상 받으려는듯ᆢ
네. 총체적인 종속 양상이 보입니다.
정신적 독립이 시급합니다.
"좌절감과 자괴감을 일정 시간 겪게 되면 그것이 자아의 일부가 되기 마련이다. " 절절히 공감합니다. 독일에 온지 3년 째, 말씀하신 것과 거의 유사한 이유로 지독한 자책과 자괴감에 자주 휘말리곤 합니다. 가끔은 이 기분이 정말 힘들어서 남으로부터보다도, 스스로로부터의 폭력이 더 무서운 것 같다는 생각도 들고요. 좋은 글 감사합니다.
힘든 과정에 계시는군요.
저도 국내에서 학위를 했지만, 외국 학자들과 교류하기 시작하면서 상처를 많이 받았어요. 그래서 저런 가설도 세워볼 수 있었습니다.
학위 잘 마무리하시길 기원합니다.
마지막 문단이 인상적이네요. 저건 그냥 피하는 겁니다... 부족함을 인정하고 부족한대로 어떻게 해보면 되지... 아예 이상한 도복이나 입고 신비주의로 가려는 것, 그것이야말로 극단이자 퇴행입니다
그렇지요.
너무 많아서 일일이 열거하기도 힘들 정도입니다.
갈수록 유학에 대한 수요가 줄어 들것이라 생각합니다.
다른관점으로 보면
저는 마약때문에 더욱 그럴것으로 보입니다.
시험을 위한 마약 뿐아니라
수많은 마약에 노출되어 있어서 위험성을 내재해 있다고 생각합니다. 유학생중 마약을 접해 보지 못한 사람을 찾기 어렵더라구여
마약 문제도 있었군요. ㅠㅠ
그 이야긴 처음 들었습니다.
내재화된 오리엔탈리즘... 혐오합니다..
문제가 많죠. 근데 사방에 널려 있네요 ㅠㅠ
전 유학은 경험이 없고 해외로 나가 일을 해보고 싶은 마음은 있습니다. 현실은 눈앞에 있는 일들을 콘트롤하기도 쉽지 않아 엄두가 나지를 않네요. ㅠㅠ
한 살이라도 젊을 때 저지르고 볼 일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