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어나서 지금까지 읽은 글쓰기 관련 책 중 기억에 남는 건 딱 두 권이다. 우선 스티븐 킹의 <유혹하는 글쓰기>. 이 책은 정말 보물이다. 스티븐 킹의 팬은 커녕 혐오자에 가까운 나였지만 그가 이 책에 풀어 놓은 썰 앞에선 녹아내릴 수 밖에 없었다. 사람들이 왜 이 남자를 스토리텔링의 왕이라 부르는지, 두 눈으로 직접 확인할 수 있는 기회였다.
그러나 글쓰기에 대한 책이라고 보기에 <유혹하는 글쓰기>에는 잡설이 너무 많다. 게다가 보물은 지침이 아니라 이 잡설에 있다. 적지 않은 양을 할애하고 있음에도 기억에 남는건 "부사를 쓰지 말라." 정도니 <유혹하는 글쓰기>를 정말 글쓰기 지침서로 분류해야 할지는, 솔직히 잘 모르겠다.
그러니 내 인생에 남은 글쓰기 지침서는 오로지 이 한권뿐이다. 오늘 소개할 책, 안정효의 <글쓰기 만보>다.
안정효는 나에게 번역가로 더 익숙한 사람이다. 우리 집에 있는 책만 헤아려 봐도 그가 번역한 책이 벌써 몇 권인지 모른다. 얼핏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최후의 유혹>과 G.마르케스의 <백년 동안의 고독>이 눈에 잡힌다. 그런데 니코스 카잔차키스는 그리스 사람이고 G.마르케스는 콜롬비아 사람이다. 그리스 사람은 그리스어를 쓰고 콜롬비아 사람은 스페인어를 쓴다. 뭐 이리 빙빙 돌려 말하냐고 따져 묻기 전에 생각해 보자. 두 대륙의 물리적 거리만큼 큰 차이가 있는 두 작품을 한 남자가 번역한다. 그것도 한 시대를 들었다 놓은 대가들의 작품을.
이런 번역은 맡긴 사람보다 맡은 사람을 칭찬해 줘야 한다. 맡긴 쪽은 약간 무책임하다. 맡긴 쪽이 무책임한게 아니라면, 아마도 역자에게 어마어마한 신뢰를 주고 있는 것이리라. 힐끗 보니 출판사가 열린책들과 문학사상사다. 둘 모두 호락호락한 회사는 아니다.
그런데 더더욱 놀라운 건 이 사람이 사실 소설가라는 것이다. 90년대 초 큰 인기를 끌었던 영화 <하얀전쟁>(1992), <헐리우드 키드의 생애>(1994)의 원작이 바로 안정효의 소설이다. 게다가 그는 영어로 작품을 쓰고 외국에서 직접 출판하는 몇 안되는, 혹은 유일한 한국 작가이기도 했다. 글에 관한한 웬만한 내공이 아니라는 말씀.
안정효가 글을 쓰기로 작정한 때는 바야흐로 대학 시절이었다. 만화가가 되고 싶었으나 서강대 영문과에 진학해 버렸다. 이왕 영문과에 간 김에 두루두루 문학을 섭렵하겠다는 생각에 그 때부터 많은 책을 읽었다고 한다. 그리고는 방학때가 되면 어느 시골 산 속에 틀어 박혀 영어로, 소설을 썼다.
영어로 소설을 썼다는것 보다 무시무시한 사실은 그가 42세의 나이로 문단에 데뷔했다는 거다. 글쓰기를 시작한지 20년 동안 그는 소설가라는 타이틀을 얻지 못했다. 이제 막 소설가의 꿈을 키우는 풋내기인 동시에 그 일을 시작하기엔 늦은감이 없지 않은 한 사람으로서, 이 사실이 전해주는 위안과 깨달음을 뼈에 새기지 않을 수 없다.
글쓰기는 뚝심이다.
<글쓰기 만보>는 글이란 무엇인가를 따지기 보다는 실제적인 작법을 가르친다. 그래서 호랑말코같은 철학은 물론 뜬구름 잡는 문장 하나 찾아볼 수가 없다. 대신 그는 과정으로서의 글쓰기, 엉덩이를 의자에 붙이고 앉아 펜으로 원고지를 밀고 나가는, 실제적 지침들로 문장을 채워나간다.
어디에 앉아 어떤 마음으로, 어떻게,
언제 시작하여 누가 끝내야 하는지,
글쓰기의 알파와 오메가를 차근차근 짚어준다.
오랜 시간 통번역을 가르친 교수의 깐깐한 첨삭 지도가 단어 하나하나에 세심히 드러난다.
하지만 <글쓰기 만보>의 가장 훌륭한 점은 이 책이 <한국어 글쓰기에 대한> <한국 사람의 책>이라는 것이다. 이 사실이 만들어내는 효용은 생각보다 거대하다. 그것을 느끼고 싶다면 지금 당장 인터넷 서점의 미리보기를 이용하여 글쓰기 만보의 첫꼭지 '수영과 글쓰기'와 어슐러 K. 르 귄의(미안해요 선생님) <글쓰기의 항해술> 서문을 비교해 보라. 한국 사람이 쓴 한국어 문장이 얼마나 강력한 흡입력을 발휘하는지, 책에서 손을 놓을 수 없다는 것이 과연 어떤 경험인지, 그걸 가장 친숙한 모국어로 가르쳐준다는 게 얼마나 고마운 일인지를, 한번 느껴보시기 바란다.
내 인생을 걸고 말하건대 이 책은 글쓰기를 배우고 싶은 사람이라면 두고두고 소장하고 찾아볼 파이브 스타 교과서다.
글쓰기에 관심은 있는데 도대체 어떻게 시작을 해야 할지 모르거나,
시작은 했는데 뻔한 문장에 가슴이 답답하거나,
여기저기 기웃거려봤지만 도무지 입맛에 맞는 작법론을 찾지 못했다면,
이 책을 대조군으로 삼아 차근차근 작법서를 독파해 나가는 것도 좋을 것이다. 이 책을 읽고 난 뒤에도 다른 작법서들이 눈에 들어온다면 말이다.
Cheer Up!
안정효 선생님은 국내파 번역가로 유명하시죠.. 하얀전쟁 출판기념회 하러 미국가신게 생에 처음 가신것이라는 전설적인 일화가 있습니다..
기본적으로 가르치는 데 이력이 나신 분 같습니다. 책을 보면 절절히 느껴져요.
글쓰기 만보 추천 받아 사 놓고 몇 년째 책장에서 잠들어 있네요.. 한 번 꺼내 봐야겠습니다.
글쓰기에 대해 읽고 싶으시면 다른 책은 필요 없습니다. 오직 <글쓰기 만보>!
여태껏 글쓰기에 대해 관심하나도 없었는데 요새 많이 느껴지네요
글쓰기 만보 기억해 두겠습니다.
비대면소통이 많아지다보니 오히려 글쓰기의 중요성이 높아진건가? 싶기도 합니다. 물론 그 형태는 많이 달라졌겠지만요.
필독서죠. ㅠㅠ 아~~~ 나도 글 잘쓰고 싶다.
필독 of 필독서죠. <글쓰기 만보>와 함께라면 누구나 챔피언이 될 수 있습니다.
글쓰기 만보를 예전에 서점에서 뒤적거린 기억이 있습니다.ㅎ 유혹하는 글쓰기는 dead님 말씀처럼 잡설을 사랑하구요. 글이 머리에 쏙쏙 들어오네요. 좋은 서평 감사합니다.^^
교과서같은 책입니다. 물론 교과서 같아서 싫어하시는 분도 있을 것 같지만, 반드시 한권은 소장해야 할 책이라고 생각해요.
소개 감사해요~^^저도 한번 읽어봐야겠어요
글쓰기 좋아하시면 꼭 한번 읽어봐야 할 책입니다.
제가 스티븐 킹의 On writing에서 건진 것은 두 가지였습니다.
근데 이것은 아무래도 영어로 글쓰기이다보니 한국사람에게는 크게 와닿지 않았습니다. 또 하나 건진 것이 있다면 '장편소설 쓰기는 욕조를 타고 대양을 건너는 것과 같은 힘든 일이다'라는 표현 정도랄까요 ㅎㅎ
저는 개인적으로 무라카미 하루키의 '직업으로써의 소설가'에서 많은 도움을 받았습니다.
추천해주신 책 또한 읽어보겠습니다 :)
실제 작법에선 <글쓰기 만보>의 도움을 받았지만 소설가로 살아가는 마음가짐에 대해선 <직업으로써의 소설가>에서 많이 배웠죠. 하루키 에세이 제대로된 게 하나도 없다고 생각하는데 이 책만큼은 진짜였습니다.
다음 달에 꼭 이 책을 사야겠습니다! 마지막 문장이 이 책이 얼마나 강력한 작법서인지 말해 주는 것 같네요.
다음 달이 아니라 지금 당장입니다! Right Now!
다 있는 책이군요. 후후....
나탈리 골드버그의 <뼈속까지 내려가서 써라>는요? 이외수의 <글쓰기의 공중부양>은요? 후후후
그것도 다 있는데요...
앵간한 작법서는 다 있습니다.
후후
하지만 가장 좋아하고 도움되고 몇번이고 읽은 책은
작가가 작가에게 <- 이거네요.
제가 졌습니다.
이번에 이벤트로 <유혹하는 글쓰기> 당첨이 되었는데 정말 좋은 책인가 봅니다! 다읽은 뒤에는 <글쓰기 만보>도 도전해볼까 합니다. 좋은책 추천 감사합니다.
유혹하는 글쓰기는 진짜 후루루루루루루룩 읽히는 책입니다. 만보는 교과서고요~
구해서 읽어보겠습니다 좋은 책 알려주셔서 감사합니다
최고의 책입니다!
그렇군요. 작법서를 읽지 않아서 제 글이 중구난방인거군요. 아! 두권의 책 기억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참 제 세대에서는 안정효 소설을 읽었죠 ㅋㅋ
역시 에너자이자님 연세가 ㅋㅋㅋ
비밀입니다 ㅋㅋㅋ
두 권의 책 모두 소장 중이라 반갑네요. 말씀하신 대로 스티븐 킹의 책은 에세이에 가깝죠. 플레이보이즈 등에 소설을 기고했다는 내용에서부터 알코올 중독에 빠진 일과 교통사고를 당한 이야기 등등, 일화의 나열이지요. 집필실 정중앙에 책상을 두었다가, 예술보다 삶이 중요하다는 생각에 책상 배치를 바꿨다는 얘기도 떠오르네요. 소설 쓰기가 화석을 발굴하는 것과 같다고 한 스티븐 킹의 말이 인상 깊게 남아 있습니다.
안정효 선생의 글쓰기는 수영과 비슷하다던 말이 기억 나네요. 책의 삽화도 안정효 선생이 그리셨죠. <글쓰기 만보>는 완독을 하지 않았는데, 이 포스팅을 읽은 계기로 다시 읽어봐야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아무래도 스티븐 킹의 책은 정말 술술 읽혀서 완독하기가 쉽죠. 반면 안정효 선생님 글은 교과서 같은 느낌이 좀 있어요. 그래서 두고두고 펼쳐볼 책이기도 하죠.
글쓰기에 관심이 많으신 분들이 스티밋에 이렇게 많다니 정말 행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