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헨델의 수상음악 사건은 떠들썩한 소문이 되어 유럽을 한 바퀴 돌았다. 영국의 조지 1세는 음악가가 실수해도 봐주는 관대한 왕이라는 인식이 생겨났다. 이렇게 되니 조지 1세는,
"응? 내가 음악하는 사람들한데 관대한 군주....?... 지 그렇지, 암. 어험 험."
하게 되고, 영국 역시 예술가에게 기회의 땅으로 비춰졌다. 헨델은 오페라 창작자였으므로 유럽의 내로라하는 오페라 작곡가들과 음악인들이 영국 땅을 기웃거리기 시작했다. 이로써 영국에 오페라의 대유행이 일어났다.
여세를 몰아 1719년 왕립 음악 아카데미가 창설되었다. 유럽 본토에서 인정받는 가수와 연주자들을 데리고 왔다. 전속 오페라 작곡가로는 헨델이 선입되었다. 다른 오페라 작곡가들도 있었지만 사실상 아카데미의 중심인물은 헨델이었다. 당연히 그가 상임 지휘자였다.
헨델은 젖과 꿀이 철철 넘치는 전성기를 맞았다. 발표하는 작품마다 영국에서 대히트를 기록했다. 어린 시절부터 일관되게 원해온 부와 명성을 거머쥐었다.
헨델에게 있어 부는 많을 수록 좋은 것이었다. 그는 왕립 아카데미 소속이지만 자기 자신이 곧 기획사이자 소속사인 시스템을 구축하고자 했다. 그래서 막대한 돈으로 이탈리아 최고의 소프라노 스타 두 사람을 스카웃했다.
한 명은 프란체스카 쿠초니,
다른 하나는 파우스티나 보르도니였다.
<왼쪽이 쿠초니, 오른쪽이 보르도니.>
쿠초니는 꾸밈없는 정석의 발성으로 높은 음역대를 소화하는 정통 소프라노였다. 그러나 연기력이 없었고 그렇게 빼어난 외모가아니었다.
보르도니는 음역대는 높지 않았지만 표현력이 풍부하고 음색이 매력적이었다. 연기력도 훌륭했다. 외모는 쿠초니를 확실히 압도했다.
다른 스타일의 두 스타는 자기야말로 주인공이라고 생각했다. 영국의 원탑이 되겠다고 바다 건너 왔는데, 웬걸. 쿠초니의 눈 앞에는 보르도니가, 보르도니의 눈 앞에는 쿠초니가 있지 않은가? 두 스타의 기싸움은 극심한 수준으로 치달아갔다.
당시 오페라에서 가장 대하기 어려운 존재는 작곡가도 지휘자도 아니었다. 스타 가수였다. 스타 가수가 대사를 바꾸라고 하면 바꿔줘야 했다. 원하면 비중도 얼마든지 늘려줘야만 했다. 소위 말해 '꼬라지'를 부르면 난리가 나기 때문이다. 공연 날 아프다고 드러누워버리면? 공연장에서 대충 해 버리면?
작곡가는 스타 앞에서 설설 기었다. 창작자와 스텝을 괴롭히지 않으면 스타라 할 수 없었다. 이 당시의 오페라곡들은 현재 잘 연주되지 않는다. 창작자가 스타의 심기를 맞추느라 음악과 드라마의 완성도가 떨어져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기 때문이다. 모짜르트도 비슷한 고생을 했다.
<파우스티나 보르도니. 미화된 그림임을 감안해도 무척 매력적인 외모였음을 알 수 있다.>
스타의 힘은 오페라가 지금의 영화와 같은 흥행사업임을 증명한다. 최고의 마케팅은 스타 마케팅이다. 관객에게는 감독보다 배우가 더 중요하다.
쿠초니와 보르도니 두 스타는 당연히 헨델을 괴롭혔다. 두 사람을 동시에 무대에 올려야 하는데, 한 명의 비중이 조금이라도 높으면 난리가 났다. 등장시간, 배역의 비중, 음역 심지어 음표 수까지도 똑같이 맞춰주었다. 물론 그래도 싸웠다.
헨델은 헨델대로 순한 사람이 아니다. 그는 참다 참다 폭발하고 말았다. 1721년, 쿠초니는 오페라 리허설 현장에서 헨델이 작곡한 대로 부르지 않고 자기 식대로 불렀다.
"아이고 프렌체스카야 너 왜 또 그러니..."
헨델이 제발 그러지 좀 말라고 사정했지만 말을 들을 리가. 헨델은 자꾸 그러렇게 할 거면 창밖으로 던져버리겠다고 했고(이때 "이년아"라고 욕설을 했다.), 여기서 질 수 없었던 쿠초니는 대놓고 반항했다. 끝까지 자기 식대로 노래를 부르자 헨델은 쿠초니의 허리를 잡고 들어올려 정말로 창밖에 내던지려고 했다. 다행히 주변에 있던 사람들이 뜯어말렸다. 죽다 살아난 이때만큼은 헨델의 지시대로 불렀다고 한다.
<쿠초니>
쿠초니와 보르도니의 갈등은 헨델을 포함해 세 사람의 문제가 아니었다. 영국의 오페라 팬들은 쿠초니 팬덤과 보르도니 팬덤으로 나뉘었다. 팬덤이 생기니 아이돌 굿즈도 팔려나갔다. 팬들은 쿠초니와 보르도니의 얼굴이 새겨친 브로치를 달고 스타를 응원했다.
응원만 하면 되지만, 그게 될 리가.
노래도 못 하는 주제에 얼굴만 예쁜 보르도니가 우리 쿠초니의 자리를 위협하고 있잖은가? 실력제일주의 어디로 출타했나?
얼굴도 못생긴 쿠초니가 왜 우리 보르도니 앞에서 설치지? 왜 예쁘고 연기 잘하고 목소리도 매혹적인 보르도니가 단독 탑이 아니란 말인가? 쿠초니 네 이년만 없었어도...
양 팬덤은 상대 스타에 대한 악성루머전에 돌입했다. 쿠초니가 헤프다더라. 보르도니가 중용되는 비밀이 있으니, 바로 헨델과 잤다더라... 오페라 현장에서 쿠초니 파트에서는 보르도니 팬들이, 보르도니 파트에서는 쿠초니 팬들이 욕설과 야유를 하며 노래를 방해했다.
급기야는 팬덤끼리 서로를 비방하며 흑색선전을 펼쳤다.
1727년, 보논치니의 ‘아스티아낙스’ 오페라 공연 현장. 분위기는 처음부터 심상치 않았다. 쿠초니와 보르도니 두 스타는 무대에서 서로를 매섭게 노려본 채 노래를 부르고 연기했다. 이미 두 사람은 대기실에서 머리끄덩이를 잡고 한 판 벌이고 나온 참이었다. 무대 위에서 노려보다가 드디어 스파크가 터졌고...
두 스타는 공연중인 무대에서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다시 머리끄덩이를 잡고 싸웠다. 그러면서 무대장치가 쓰러지는 등 엉망진창이 되었다. 동시에 보르도니 팬들과 쿠초니 팬들이 객석에서 일거에 일어나 치열한 패싸움에 돌입했다.
당시는 오페라를 관람할 때 정복 착용이 매너였다. 문제는 정복에는 허리에 차는 검도 포함되어 있다는 것. 그런데 객석은 만원이었고 오페라하우스 내부는 생각보다 좁다. 너무 혼잡해서 칼을 뽑고 싶어도 옆 사람에 걸려서 안 뽑혔다. 다행스럽게도 양측은 주먹으로 패싸움을 벌였다.
하필 현장에 왕세자빈 저하가 앉아있었다는 게 큰일이었다. 부상은 없었지만 칼싸움 백병전이 일어났다면? 저하의 옥체에 참사가 벌어질 수도 있었다.
이 사건으로 영국 내에서 오페라의 위상은 땅에 떨어지게 되었다. 오페라 공연이 무기한 중지되었다. 왕립 아카데미는 수입이 끊겨 처음으로 적자를 맞았다.
헨델은 다음 해에 보르도니와 쿠초니와 재계약을 하지 않았다. 그러나 너무 늦었다. 이미 그의 몰락은 시작되었다.
패싸움 사건 다음 해인 1728년, 영국 문화사에서 중요한 사건이 일어났다. <거지의 오페라>라는 기묘한 작품이 무대에 올랐다. 극작가 존 게이가 쓰고 흥행사 존 리치가 제작한 <거지의 오페라>는 제목대로라면 오페라지만 실은 오페라를 패러디한 뮤지컬이다. 장르는 본격 코믹 소동극이었다. 그리고 이탈리아어가 아니라 최초로 영어로 된 작품이었다.
<거지의 오페라>의 모티브는 귀족층에 대한 풍자와 조롱이었다. 당연히 패싸움 사건도 중요한 모티브였다. 당시 영국의 서민층은 귀족들의 오페라 열풍을 고깝게 보고 있었다. 오페라는 기본적으로 외제 문화고, 거들먹거리는 문화다. 영국 서민층은 전통적으로 귀족층을 놀려왔다.
'꼴깝들 하시네. 고오급 이태리어 알아듣기는 하시나?'
이 심리가 1번이었다. 두 번째는 문화의 하향 현상이다. 상류층이 향유하는 문화는 기층민도 탐한다.
'우리도 저런 거 한 번 누려보자.'
두 심리가 맞물렸다. 평민이 평민 관객을 위해 제작된 <거지의 오페라>는 귀족층은 물론 영국 의회와 오페라문화, 그리고 헨델을 저격했다. 이 작품은 대히트라는 말로도 부족할 정도의 기록적인 흥행을 거뒀다. 무려 62회 연장공연에 성공했고 18세기 영국에서 가장 많이 공연된 작품이 되었다.
무뢰배, 거지, 창녀들이 주인공인 <거지의 오페라>에서 두 여성이 머리끄덩를 붙잡고 벌이는 싸움은 당연히 등장한다. 창녀 둘이 한 남자를 차지하기 위한 싸움인데, 그 남자란 당연히 헨델을 풍자한 캐릭터였다.
<거지의 오페라>는 서민들에게 친숙한 민요를 개작해 만든 작품이다. 영국, 스코틀랜드, 아일랜드, 프랑스 민요를 끌어왔다. 헨델의 기준에서는 아마추어들의 놀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그가 가장 중요시하는 흥행에서 넉아웃당했다.
영국에는 “Gay got rich and Rich got gay.”라는 말이 유행했다. 존 게이는 리치해지고(부유해지고) 존 리치는 게이해졌다(즐거워졌다)는 뜻이다.
헨델은 우울해졌다. 풍자의 대상으로 전락한 헨델의 음악은 더 이상 핫하지 않았다. <거지의 오페라>가 영국을 휩쓴 1728년 왕립 오페라단은 적자를 견디지 못하고 문을 닫았다. 하지만 헨델은 부와 명성을 포기할 사람이 아니었다. 헨델은 재기를 위해 2차 왕립 아카데미 창설을 주도했다.
(다음 편에 계속...)
헨델 떴드아!!!
Cheer Up!
음악에 관심을 갖고 싶은데.. 좋은 포스트군요.. 감솨.. 업보팅 and 팔로우함다.
금방 휘리릭 하고 다 읽었습니다. 왜 @fielddog님의 블로그를 모르고있었는지 모르겠습니다. 퐐로합니다.
헨델이 앞으로 어떻게 해나갈까요???다음이 궁금해요 ㅎㅎ
음악을 알지 못하는 저에게는 모든 내용이 신기하게 느껴지네요.ㅎ
행복한 하루 되시길 바라겠습니다.
재밌게 잘 읽고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저 당시에도 저런 팬덤의 대중문화가 있었다는게 놀랍네요.
역시 인간사는 다 비슷한가봅니다 ㅋㅋㅋ 엄청 재밌게 읽었네요
아 4편을 다 읽고서야 이제서 인사드립니다. 이웃 분이 리스팀해 주신 덕에 시리즈를 읽게 되었는데, 중간에 대역폭에 걸려 댓글을 달지못해 병날 지경이었어요! ㅎㅎㅎ
이제 다 읽고 나니 다음 편이 궁금해서 병나게 생겼네요 ^^
저는 이제 2주 좀넘은 뉴비인데, 미술쪽 글을 조금씩 써 보고 있어요. 그런데 fielddog님의 이 시리즈글을 읽으니 음악사에 대한 지식과 위트넘치는 글솜씨가 너무나도 부럽습니다 @_@
과연 비범한 속물인 헨델이 명예의 추락을 어떤 식으로 탈출시도할지 궁금하네요! 네편 모두 너무나 재미있게 읽었고요! 다음편을 또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감사합니다 :)
예나 지금이나...늘 느끼는거지만 별반 다를께없네요 ㅎㅎ
복작복작하게 사는거 같습니다 ㅎㅎ
어려울 수 있는 오페라 이야기 넘 재밌게 읽고 갑니다.
다음편도 기대할께요. :)
흥미진진! 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