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agom är bäst
라곰이 최고다. 스웨덴에서 처음 배운 말이다.
웁살라에서 유학생활을 시작하면서 나는 학생 아파트에 살았다. 부엌에 두고 함께 쓰는 냉장고 문에는 알파벳 자석이 가득 붙어 있었다. fika, älska 등의 단어 사이에 유일한 문장으로 된 말이 바로 '라곰 애르 베스트', 즉 '라곰이 최고다'였다.
"라곰이 뭐야?" 하고 묻는 나에게 스웨덴 친구들은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적당히'라는 의미지만 뭘 할 때 적당히 하라는 것은 아니고, '중간'이랑은 또 다른 개념이며 '온건함'도 아닌 그 무엇이라고 했다. 친구 딴에는 스무고개라도 하는 줄 알았는지 여기저기서 의미를 끌어와 설명해주었지만 여전히 와 닿지 않았다.
책을 번역하면서 알듯 말듯 감질나는 설명에 답답해하던 나와, 딱 맞는 표현이 떠오를 듯 말듯한 친구사이의 실랑이가 떠올라 많이 웃었다. 당시에는 '아니, 자기네 나라 말인데 왜 이렇게 설명을 못하지?' 하고 의아하였더랬다. "적당히가 어떻게 최고가 될 수 있어? 적당히면 중간이지." 하고 묻는 나에게 친구는 두 손 두 발 다 든 표정을 지으며 "라곰은 복잡한 개념이야. 라곰을 살아봐야 해."라고 말했다. '라곰이 복잡한 개념이라는 것은 알겠는데 뭔지는 여전히 모르겠다.'가 내가 그날 내린 결론이었다.
<라곰> 원서+한글판, 롤라 오케르스트룀 저/하수정 역 | 웅진지식하우스
스웨덴 사람이라면 누구든 알지만 딱히 무엇이라 꼬집어 설명하기는 어려운 그 무엇이 바로 라곰이다. 특정 단어에 문화적 의미가 여러 겹 덧입혀져 입체적이 되면 해당 언어를 다른 언로로 바로 대체하기 어렵다. 문화와 맥락을 모르는 사람에게 이를 설명하느니 직접 느껴봐라 하는 것 말고는 딱히 명쾌한 답이 없을지도 모른다. 마치 누군가 한국인에게 "'정'이 뭐야?" 하고 물으면 딱 떨어지게 설명하기 어려운 것과 비슷하다.
친구의 말이 맞았다. 온갖 단어로 설명해도 이해가 안 되던 라곰을 스웨덴에 살면서 조금씩 깨닫게 되었다.
스웨덴의 학생 아파트 구조는 층마다 복도를 중심으로 양쪽에 주르륵 개인별 방이 있고 거실과 부엌은 공유하는 식이다. 개인의 생활을 중요하게 여기지만 교류의 장을 만들어 공동체 문화를 형성하기 위해 고안한 구조다. 끼니때가 되면 같은 복도에 사는 친구들과 자연스레 얼굴을 마주하게 된다. 누구는 요리를 하고, 누구는 좀 일찍 차려 식탁에서 먹는다. 친구가 찾아오면 거실 소파에서 차를 마시거나 주말에는 각자 음식을 좀 넉넉히 만들어 파티를 하기도 한다.
각 방은 원룸 형태로 방에 개인별 화장실과 욕실이 붙어있었다. 너구리처럼 자기 방안을 굴 삼아 지내며, 끼니도 남들보다 조금 일찍 또는 늦게 챙겨 먹으면 아예 이웃을 안 보고 살 수도 있다. 개인성이 보장된 공동생활이다. 지내면서 자연스레 혼자의 시간을 즐기는 법과, 소통하며 서로를 배려하는 법을 배우게 된다. 다음에 쓸 사람을 위해 부엌을 정리하고 싱크대에 그릇을 쌓아놓지 않기, 안 쓰는 물건이나 먹을거리에 메모를 붙여 공동 공간에 두고 나누기, 옆 방이 너무 시끄러우면 노크하고 불편하다 말하거나 방문에 메모를 붙여두기, 아끼는 개인 용품은 개인 찬장에 넣어두고 쓰기 등 암묵적 규율을 하나씩 익힌다. 여럿이 지내도 불편하지 않게 사는 법을 체득한다.
작은 단위지만 이상적인 공동체였다. 이렇게 서로를 배려하며 살면 싸울 일도 없겠다 싶었다. 마을이 모여 국가가 되니 결국 내가 할 수 있는 단위부터 유토피아를 만들어가는 것이다.
라곰을 번역하면서 퍼뜩 공자의 중용이 떠올랐다. 공자가 그리는 유토피아인 요순시대를 일구는 핵심 가치가 중용 아니었던가? 사전을 펴고 중용을 찾아보았다.
中庸
'지나치거나 모자라지 아니하고 한쪽으로 치우치지도 아니한, 떳떳하며 변함이 없는 상태나 정도'.
라곰과 일맥상통하는 데가 있다. 내친김에 논어 해설집을 집어 들었다. '술을 즐기되 취하지 않는다. 무엇이든 억지로 하지 않는다. 거친 밥을 먹고 맹물을 마시며 팔베개를 베어도 그 가운데 즐거움이 있다.' <라곰>을 번역하면 본 내용이 그대로 들어있었다.
라곰과 중용은 놀랄 만큼 비슷한 지점이 많다. 두 개념 모두 개인의 삶을 반추하고 남을 헤아려 관계를 건강히 하고 공동체를 세우는데 목적을 두고 있는 점도 같다. 궁극의 이상향을 지향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인간에게는 본능적으로 행복, 비단 나만의 행복이 아니라 공동체의 행복을 추구하는 마음이 있다. 이것은 보편타당한 가치다. 문화가 달라도 시대가 변해도 큰 차이가 없다. 근대에 접어들어 문화별로 행복을 정의하는 척도가 달라진 것은 사실이다.
나만 해도 그렇다. 어느 날 웁살라에서 지낼 적에 수업을 마치고 친구들과 맥주를 한 캔씩 들고 잔디에 드러누워 하늘을 바라보고 있었다. 시답잖은 소리를 주고받다가 그냥 아무 말 없이 누워 시간을 보냈다. 구름이 흐르는 것도 보고 간질거리는 바람도 느꼈다. 문득 참 행복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한국에 있을 적에 내가 행복했던 때가 언제였나 하고 떠올려보았다. 상을 탔을 때, 원하던 곳에 가게 됐을 때, 어렵게 상대의 동의를 이끌어내 일을 성사시켰을 때 등 무언가를 성취했을 때가 떠올랐다.
왜 나는 이 곳 스웨덴에서는 존재만으로 행복한데 한국에서는 무언가를 성취해야만 행복했을까? 이곳에서 느끼는 절대적인 행복감과 달리 왜 한국에서는 내가 상대적 우위를 점했을 때 행복을 느꼈을까? 고작 몇 년 사이에 속한 사회에 따라 개인이 느끼는 행복의 요소가 달라진다면 절대적인 '나'가 존재하는가 하는 의문도 들었다. 라곰은 잠깐 흔들렸던 행복의 기준을 일깨워주었다.
마음속 깊은 곳을 들여다보면 사실 행복을 느끼는 데에는 별로 많은 것이 필요하지 않다. 라곰은 삶의 곳곳에서 행복을 발견하도록 도와주는 길잡이다. 북유럽의 제도를 베껴와 적용한다고 한국이 북유럽이 될 수는 없다. 나라마다 역사와 문화라는 맥락이 있다. 제도에는 사회적 공감과 자발성, 또한 개인의 가치관이 녹아들어야 한다. 정부는 정부대로 개인은 개인대로 할 일이 있다. <라곰>의 저자인 롤라가 말한 것처럼 스웨덴의 삶의 지혜를 빌려와 내 삶의 지혜로 삼아보자. 우리가 당연하다고 여겼던 것이 사실은 나를 억누르고 내 행복을 숨겨 왔던 것은 아닌지 곰곰이 생각해보자.
스웨덴에서 지내며 나 역시 아는 것 같지만 명쾌하게 설명하기 어려웠던 스웨덴의 행복의 비결 '라곰'을 이 책은 참 친절하게 설명해 놓았다. 북유럽식 진한 커피를 옆에 두고 몇몇 대목에서는 고개를 끄덕이며 즐거운 마음으로 번역했다. 책을 덮으며 모든 분들의 마음이 가벼워지기를, 볕 좋은 곳에서 피카를 하며 삶의 영역을 하나하나 점검해봐야겠다 하는 마음이 든다면 그것으로 이 책은 제 몫을 한 것이다.
p.s.
덴마크에 휘게가 있다면, 스웨덴엔 라곰이 있지요. 노르웨이에는 코셀릭, 핀란드에는 깔사리껜닛ㅎㅎ
감사합니다ㅎㅎ 진한 커피 한잔 하면서 이야기라도 나누고 싶네요! ;)
이 글을 보고 리디북스 카트에 라곰을 넣었습니다. 안읽은 책이 조금 줄어들면 결제해야겠어요 :) @홍보해
주말에 햇빛나는 카페 창가에 혼자 앉아 읽기 좋은 책이에요. 아님 소파에 전자렌지에 돌린 인절미처럼 녹아들어서 보셔도 좋구요 ;-)
전자렌지에 돌린 인절미라는 표현 저도 좋아합니다! 따끈한 주말에 시도해 보아야겠습니다 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