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1년 4월 26일. ‘강경대’ 가 죽었다!
명지대학교 1학년. 이었던 강경대는..
등록금 인하와 학원자주화 투쟁에 가담을 하다가..
데모를 진압하던 백골단의 쇠파이프에..
무자비하게 집단 구타! 를 당해서.. 살해! 되었는데..
나는.. 그와.. 일면식도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동갑내기에.. 불과 얼마 전에.. 종로에서..
목격했던 장면! 과 정확하게 오버랩이 되면서..
정말로 남의 일. 같지 않게 느껴졌던..
엄청난 사건! 이자.. 충격! 이었고..
이때부터.. 나는.. 거의 빠짐없이..
시위에 참가를 하게 되었던 것 같다.
강경대가 죽고..
시신이 연대 세브란스에 안치되어 있었기에..
주로.. 연대와 신촌을 중심으로..
추모 집회가 많이 열렸는데..
그래서.. 신촌 일대는.. 매일 같이..
자욱한 최루탄 연기 속에.. 지내야만 했다.
5월 14일에..
명지대학교에서 영결식이 열렸고..
운구 행렬은.. 시청으로 이동하여..
노제를 지내려고 했으나..
전경들의 저지로.. 이동하지 못했고..
결국.. 연대에 계속 머무르게 되었다.
(예나 지금이나.. 장례식조차..
제대로 치를 수 없게 만드는.. 그들. 이었다 ㅠㅠ)
며칠 후인.. 5월 18일에..
노제 장소를 서울역으로 옮기고..
영결식을 다시 진행하였으나..
또.. 전경들이 저지한 탓에..
결국은.. 공덕동에서 노제를 지냈다.
그런데.. 강경대의 죽음은..
불행한 일들의 서막에 불과했다! ㅠㅠ
대한조선공사(현 한진중공업)의..
노조위원장. 이었던..박창수라는 분이..
강경대 타살에 항의하는 단식 투쟁을 하던 중..
의문의 부상을 입고, 안양병원으로 이송되었는데..
진짜 사건은.. 그 다음이었다.
5월 6일 새벽, 안기부 요원들을 따라나섰던 그는..
병원 뒷마당에서.. 변사체로 발견되었고..
바로 다음날..
백골단과 전경들이.. 최루탄을 퍼부으며..
영안실 벽을 해머로 부수고 들어와..
고인의 주검을 빼앗아갔다.
이후에.. 경찰은 강제로 부검을 실시하더니..
‘단순추락사’로 사인을 발표했다. ㅠㅠ
또, 5월 25일에는..
성균관대 학생이었던.. 김귀정이..
시위 도중에.. 백골단을 피하려다가..
최루탄 세례와 무차별 구타 속에 압박 질식사했다.
동시에..
연이어 벌어졌던.. 분신.. 분신.. 분신..
그렇게.. 많은.. 무고한 목숨들이..
불의에 항거하며 스러져갔고..
전 대학에는 휴교령. 까지 내려질 거라는..
흉흉한 소문이 돌기 시작했을 정도로..
사태는..
점점 걷잡을 수 없을 만큼 커져서..
노태우 정권에 반대하는 시위가..
연일.. 대규모로 벌어졌다.
(87년 6월 항쟁 이래.. 최대 규모. 였다고..
할 정도로.. 정말 엄청난 항쟁. 이었는데..
나 역시.. 이때는.. 학교가 아니라..
거리에서.. 더 많은 시간을 보냈던 것 같다;;;)
그렇게.. 노태우 정권은 막판까지 몰렸고..
사람들은.. 제 2의 6.29 선언으로 피해가거나..
군대를 동원해.. 정면 돌파하거나..
둘 중의 하나의 상황만을 예측하고 있었다.
그런데.. 전혀 뜻밖에..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던 방식으로..
역습이 들어왔는데..
- 다음으로 이어집니다.
어두운 현대사는 적날하게 보내요ㅠㅠ
그랬었지요... 스무살이 되던 해의 기억이라..
너무 충격이 커서.. 지금도 생생히 기억 되네요 ㅠ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