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팀잇라디오] Ceora by Lee Morgan

in #kr7 years ago (edited)


재즈를 듣기 시작하게 된 건 1993년 1월 3일 혹은 4일부터였다. 학력고사 -수능이 아닌- 를 보고 1월 6일로 예정되어 있던 합격자 발표를 기다리고 있던 중이었다. 평소보다 제법 시험을 잘 본 터라 조마조마한 마음은 별로 없었다. 하지만 마지막 학력고사는 예년보다 쉽게 출제되었고, 나를 포함한 모든 수험생들의 점수가 껑충 뛰었다는 건 1지망이 아니라 2지망에 합격한 것을 알고 난 뒤에야 실감하게 되었다.

어쨌건 그 지루한 며칠을 보내는 동안 교회 선배 하나가 전화를 해서는 '너 음악 좋아한다고 했지? 내가 근사한 곳 데려갈께' 하며 말을 걸었다. 세 살 혹은 네 살 정도 위의 누나였다. 뭐, 시간이 지나가기만 기다리던 차에 싫다고 할 이유가 없었다. 그렇게 해서 1월의 첫 일요일 밤에 처음으로 재즈 클럽이란 곳에 발을 딛었다. 그날 나는 커피를, 선배는 블랙 러시안을 마셨다.

음악이 연주되는 동안 나는 아무 말을 하지도 않고, 동행한 선배의 존재마저 잊어버렸는지도 모른다. 그런 내게 선배는 첫번째 셋이 끝나고 나서야 '어때, 괜찮니?' 하며 겨우 말을 걸었다. 그리고 우연히 선배의 선배를 그곳에서 만났다. 알고보니 그 사람이 골수 재즈 팬이었고, 주변 사람들을 하나씩 둘씩 재즈 클럽으로 불러들인 장본인이었다. 연주가 끝나고 돌아오는 길에는 가볍게 눈이 흩뿌렸다.

그 날 이후 나는 일요일 밤이면 이사람 저사람을 끌고 재즈 클럽에 드나들게 되었다. 합석이 기본이라 아무래도 혼자 가기에는 좀 그랬다. 대체로 이성과 함께 가긴 했지만, 그 누구도 내가 마음이 있어서 데려온 것이라 오해하지 않았다. 연주가 시작되면 이내 입을 닫고 상대방 쪽으로는 시선 한 번 돌리지 않았으니까.

연주가 밤 아홉시에 시작하곤 했는데 여덟시 쯤, 늦어도 여덟시 반 이전에는 도착하려고 했다. 아홉시 이전에 1부 무대로 연주하는 밴드가 있었지만 내가 보려고 하는 밴드는 2부 밴드였다. 중년이라고 하기에는 조금 나이가 많은, 하지만 노인은 아닌 색소폰 주자가 이끄는 밴드였다. 다른 멤버들은 리더보다 적어도 열 몇 살은 어려보였다. 리더는 제법 무서운 인상을 하고 있었는데, 무대 위에서도 멤버들의 연주가 마음에 들지 않거나 하면 인상을 쓰기 일쑤였다. 무슨 이유에서건 가끔씩 파안대소하기도 했는데 그 웃음마저 없었다면 후배들이 같이 연주하기 쉽지 않았을 것이다.

늘 피아노 앞 테이블에 자리를 잡았다. 어렸을때는 그렇게 싫어했던 피아노가 재즈라는 음악을 만나서는 전혀 다른 악기가 되어있었다. 저렇게 연주할 수만 있다면, 하고 마른 꿈을 꾸었다. 하지만 나는 일곱 살때 바이엘 하권을 채 마치지 못하고 피아노 레슨을 그만두었다. 도무지 가능성이 없었다.

여덟 시 십 분에 도착해도 피아노 앞 테이블 자리가 없을 때가 종종 있었다. 그럴때면 무대 앞 두 번째 테이블에 자리를 잡았다. 아무래도 맨 앞자리는 조금 부담스럽다. 하지만 그마저도 여의치 않으면 결국 맨 앞자리에 앉게 되었다. 무대와 테이블의 거리가 없다시피 해서 고개를 들면 서로의 시선이 부담스러워질 정도였다. 어쩔수 없이 시선을 사선으로 한 채로 음악을 들을 수 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렇게 맨 앞자리에 앉으면 그들끼리 주고받는 말소리까지 또렷이 들렸다.

"다음 곡 뭐 할까....음, 우리 쎄요라나 할까?"

쎄요라, 도대체 그게 무슨 단어인지 알 길이 없었지만 이내 시작한 멜로디는 내 마음을 휘감아버렸다.

Ceora는 여자 이름이라고 합니다만, 흔한 이름이 아닌지 다들 이런저런 의견이 분분하네요. Ciora 혹은 Ciara의 변형이라고 하기도 하구요. 분명한 건, 너무도 낭만적이고 아름다운 이 곡의 멜로디와 화성 진행이 정작 연주를 해보면 만만치 않다는 겁니다. 그러고 난 후에 이들의 연주를 들으면 과연 이들이 나와 같은 사람인가 싶은 생각이 들구요. 종종 학생들에게 (재미없는) 우스갯소리로 이사람들은 반인반신이야, 이들처럼 못한다고 좌절하지 마, 이런 얘기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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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즈를 언제부터 좋아했는지 정확히 기억나진 않지만 처음 좋아했던 앨범은 기억합니다. 3대 디바; 엘라 피츠제럴드, 빌리 홀리데이, 사라 본의 노래를 각각 한 장씩 담은 앨범이었죠. 처음 운전할 무렵 야간 주행을 할 일이 많았는데 그때 자주 들었습니다. 재즈를 좋아하게 된 일이 저에게 각별하게 다가올 줄 알았다면 기록을 해 둘 걸 하는 생각이 드네요. 다행히 재즈 클럽 첫 방문은 파리에서 일어난 일이라 정확히 기억하지만요.

김작가님이 재즈를 좋아하신다니 왠지 모르게 기분이 좋네요! 작가님 글과 사진을 열심히 구독중인 열혈팬이라 그런가봅니다. 파리의 재즈클럽 이야기 한번 들려주세요 ㅎ

언제가 될지 모르지만 기회가 되면 풀어 볼게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