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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 인문학으로의 초대 - 5. 햄릿과 돈키호테

in #kr7 years ago

유쾌한 광인이 되어 산초 판사, 로시난테와 함께 쏘아다녔던 세르반테스도 돈키호테의 모험이 끝남과 동시에 현실로 돌아왔다는 시각이 굉장히 신선하고 그럴 법 합니다.

다른 사람들 눈에 A'가 보여져도 A'로 보이고 싶은 A의 페르소나일 뿐이니, A'로 위장하는 행태조차도 A의 성질에 지나지 않는 것이 아닐까요?


세르반테스의 세익스피어가 얼마나 유명했는지를 잘 알려주는 일화가

오타가 하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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엉~~ 오타를 찾아내셨군요, 알려주셔서 감사합니다.
생각나는 대로 적다보니까 오타 난것도 몰랐네요,
감사합니다

댓글 내용에 대한 이야기도 해주세요! 한번 이야기 나누어보고 싶어 쓴 댓글입니다.

A'로 보이고 싶은 A의 위선적인 가면이 진짜로 위선적인 가면일까요?
마치 광대극에서 배우의 진짜 감정과는 상관없이, 웃는 모습의 광대얼굴가면을 쓰고는
무대극을 펼치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라고 생각이 듭니다. 물론 위의 글은 세르반테스가 돈키호테라는 광인의 해학적인 모습을 빌려서 자신의 내면이 원하고 있는 이상향적인 측면을 갈망하는 것이 아니었을까라는 추론에서 전개된 내용입니다.
어쩌면, 진짜로 세르반테스의 내면에서는 역사적으로 알려져 있었던 그의 개인적인 고난의 삶과는 다르게 매우 유쾌하고 웃음기 가득한 인생을 살다간 사람이었는지도 모르지요.
어쨋든 돈키호테를 통해서 알 수 있는 것은 세르반테스의 페르소나가 아니라, 그러한 페르소나를 드러내게 된 세르반테스의 성질이 과연 어떤 진짜를 가지고 있었느냐를 알아본다는 것이 무척 재미있는 논란거리가 될 것 같다는 것입니다.

사람이 만나는 사람, 자리에 따라 페르소나를 바꾸는 것은 역할기대가 가장 주요한 문제일 것입니다. 그리고 역할기대를 통해 나타난 페르소나인 A'는 A가 역할기대에 순응한 표현형이라 할 수 있습니다. A에게 자기자신이나 주변인들이 품는 역할기대는 A의 성질에 근거하고 있을 것이며 그 역할기대에 순응하여 표현하는 형태 또한 A의 성질에 근거하고 있을 수 밖에 없습니다.

고난과 해학은 공존할 수 없는 것이 아니기에, 아니, 오히려 고난의 시기에 해학은 더욱 발달하였기에 세르반테스와 세익스피어의 삶과 작품의 분위기의 대조가 조금 더 이해가 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