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안희정 지사의 성폭력 사실이 알려지면서 온 나라가 들끓고 있습니다. 먼저 어려운 상황에서도 피해 사실을 밝힌 피해자 분의 용기에 대해 지지의 마음을 보냅니다. 한국 사회 전체가 남성 중심적인 권력 구조를 가지고 있지만, 그중에서도 그 정도가 심한 정치권에서 겪었을 고난과 아픔이 심하였으리라 생각합니다. 피해자의 치유와 더불어 가해자에 대한 마땅한 처벌을 바랍니다.
2. JTBC 뉴스룸에서 성폭력 사실이 알려진지 한 시간 30분 만에, 안 지사의 소속 정당인 더불어민주당은 긴급 최고위원회를 열어 "당 최고 수준의 징계인 출당 및 제명을 결정"했다고 합니다. 빠르게 문제에 대응하기 위해 노력한 더불어민주당의 노력에 박수를 보냅니다.
3. 다만 좀 의아한 점이 있습니다. 저는 안 지사에 대한 출당과 제명 조치가 당 차원에서 꼭 이뤄져야 할 일이라고는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 결정이 당 최고위원회에서 바로 이뤄진 것처럼 보도가 되는 상황에 대해서는 약간의 문제 의식을 가지고 있습니다.
위에서 링크한 뉴스1 기사 제목은 "민주, 수행비서 성폭행 의혹 안희정 출당 제명 결정" 입니다. 기사의 내용이 사실이라면 "민주당은 안 지사에게 따로 확인은 하지 않았고 향후 당 차원의 자체조사도 진행하지 않을 예정"이라고 합니다.
4. 모든 정당 조직은 강령, 당헌, 당규를 가지고 있습니다. 강령은 당의 이념과 정책적 지향을 드러내는 문서이며, 당헌은 당의 기본 구조를 정하고 당 운영의 방침을 설명하는 헌법과 같은 문서입니다. 그리고 당규는 당헌에 따르는 구체적인 당 운영의 규칙들을 적은 문서입니다.
더불어민주당 당헌에 따르면 당 최고위원회는 당무 집행에 관한 최고책임기관 입니다. 당 대표와 최고위원들로 구성된 대표단의 성격을 가지며, 당 주요 정책을 심의 의결하고, 주요 당무를 심의 의결하는 집행기관입니다. 정부로 따지자면 행정부의 최고 기구인 국무회의라고 할 수 있습니다.
최고위원회가 행정부의 최고 기구인 국무회의라면, 입법부의 역할을 맡는 것은 전국대의원대회입니다. 국회와 같은 역할을 하며, 당 대표와 최고위원을 선출하는 기구도 역시 전국대의원대회입니다.
행정부, 입법부가 있으니 사법부와 유사한 역할을 맡는 곳도 있습니다. 당 윤리심판원이 바로 그곳입니다. 당 윤리심판원은 당원에 대한 포상과 징계 업무를 관장합니다. 사법부가 입법부와 행정부로 부터 독립되어 있듯이, 더불어민주당 당헌에 의하면 윤리심판원은 대의기관 및 집행기관으로부터 독립하여 그 직무를 수행합니다. 당원의 징계에 관한 사항은 이 윤리심판원의 소관입니다.
5. 이제 제가 하고 싶은 말을 다들 눈치 채셨으리라 생각합니다만, 안 지사의 출당과 제명은 엄연히 당원의 징계에 관한 사항입니다. 당원의 징계는 윤리심판원의 소관이며, 윤리심판원이 아닌 이상 당 대표든 최고위원회든 당원을 자의적으로 징계할 수 없습니다. 지난 달 말, 더불어민주당 부산시당에서 일어난 성추행 사건에 대한 뉴스를 보더라도 이는 명확해지는데요, " 추미애 대표는 부산시당이 조속히 윤리위원회의를 소집해 가해자에 대한 조치에 나서라고 주문"했다고 나와있습니다. 더불어민주당 당 대표인 추미애도, 최고위원회도 윤리심판원에 당원을 회부할 수는 있어도, 직접 징계할 수는 없습니다.
6. 따라서, 처음 인용했던 뉴스1 기사는 사실이 왜곡된 기사입니다. " 더불어민주당은 5일 자신의 수행비서를 성폭행 했다는 의혹을 받고 있는 안희정 충남지사에 대해 당 최고 수준의 징계인 출당 및 제명을 결정"한 것이 아니라, 추미애 대표의 워딩 그대로 " 안희정 도지사에 대해선 출당 및 제명 조치를 밟기로 결정"했다고 해야 맞습니다. 조치를 취하기로 한 것이지, 바로 제명이 된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참고로 다른 기사에 따르면 윤리심판원 회의는 다음 날 바로 진행하기로 결정되었다고 합니다.
7. 추미애 대표의 대국민 사과문 역시 엄밀히 말하자면 문제가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앞서 살펴봤듯이 당 윤리심판원은 집행기관으로부터 독립적으로 직무를 수행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아마도 당연히 윤리심판원에서도 출당 및 제명 결정을 내리겠지만, 최고위원회에서 바로 징계의 내용을 결정하여 통보하듯이 '출당과 제명'을 이야기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최고위원회 회의를 연 후, 추미애 대표가 밝혀야 했을 것은 '최대한 빠른 시간 내에 윤리심판원을 열어 징계를 논의하겠다, 당규에 따르면 출당 및 제명이 마땅한 사안이라 보인다'라는 입장이었어야 합니다. 특히 안희정 지사 측의 입장이 제대로 표명되지 않았던(글을 쓰는 지금은 입장이 나왔습니다만,) 상황에서 자체 조사와 확인 없이 출당을 결정한 것 역시 정당 조직으로서 온당한 처리가 아니라고 보여집니다.
8. 당 내에서 성폭력 사건이 터졌을 때 피해자에 대한 사과와 더불어 가해자에 대한 징계가 내려지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그러나 피해자가 또 다른 피해자의 존재를 암시하는 증언을 한 상황에서, 안희정 지사의 또 다른 가해 사실이 없는지 진상조사위를 꾸리고 안 지사에 대한 사실 조사에 들어가는 것 역시 정당이 해야할 일이라고 봅니다. (물론 이 역시 피해자와의 논의를 통해서 진행되어야 하는게 맞습니다.)
바로 출당과 제명을 이야기한다면, 더 이상 안 지사는 당원이 아니기 때문에 당 차원에서 가해자에 대한 조사를 강제하기 어려워질 수 있습니다.
9. 더불어민주당의 빠른 대응은 분명 긍정적인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 과정에 있어서 정당으로서 당헌과 당규에 기반한 절차와 처리가 이뤄졌다고 보기엔 의구심이 듭니다. 더불어민주당의 당원도, 지지자도 아니지만 민주적인 정당 정치의 발전을 중요하게 여기는 사람으로서, 집권 여당인 더불어민주당의 행보에 아쉬움을 가지게 됩니다.
무엇보다도 정당의 기본적인 절차와 규정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아무런 의문 없이 '출당과 제명'이 최고위원회에서 바로 결정되었다는 듯이 기사를 낸 언론사들에게도 문제의식을 느낍니다. 아무리 나쁜 짓을 저질렀더라도 법원에서의 판결 없이 형사처벌 할 수 없듯이, 윤리심판원, 혹은 징계위원회의 조사와 회의 없이 바로 징계가 불가능한 것은 어지간한 조직이라면 당연한 일입니다. '제명과 출당 조치를 밟기로 했다'고 워딩 그대로 쓴 것도 아니고, 마치 정당의 최고 지도부가 당원들에 대한 처사를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것 처럼 기사를 낸 것은 정당과 정치에 대한 시민들의 오해를 확산 시킬 수 있는 일이라고 보여집니다.
이에 더해, 더불어민주당은 안 지사에 대한 출당과 제명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향후 추가적인 피해 사실이 있는지 조사하고, 성폭력적인 당 내의 위계구조에 대해 문제 의식을 가지고 바꾸기 위한 노력과 더불어 피해자의 치유를 위해 힘써주기를 바랍니다. 다시 정당 내에서 이러한 일이 벌어지지 않도록 정치권 전반이 자신들의 조직과 문화를 되돌아보길 바랍니다.
회사 법인도 그렇듯 정당도 조직이 있고 규정이 있는데 .. 다른 사람도 아니고 유력 차기 대선 주자였던 사람의 일이니 민주당에서도 놀라고 언론에서도 갑작스러웠나 봅니다.
성폭력에 대한 처리는 가해자가 유명인사든, 그렇지 않든 피해자 입장에서 공정하게 이뤄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 내용을 자세하게 알지는 못하지만 제가 두 번째로 링크한 기사에서, 부산시당 성폭력 사건의 피해자가 안 지사에 대한 출당과 제명 소식을 듣고 유사한 사안임에도 불구하고 안 지사에 대한 징계는 최고위원회 차원에서 너무나 빠르게 이뤄지는데, 부산시당 사건 가해자에 대한 징계는 느리게 이뤄지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혹을 느끼고 상처를 받지나 않을까 하는 걱정이 있습니다. 당의 절차와 규칙은 당원의 위치가 어떠하건 간에, 공정하고 평등에게 적용되어야 하는데 말이죠.
사실 더 안타까운 것은 언론이 제대로 사실 파악을 하지 않고 기사를 내는 관행에 대해서 입니다. 만약 정치부 기자라면, 정당 조직의 절차와 구성에 대해서도 어느 정도 이해가 있을텐데...
일단은 먼저 기사를 내고봐야 타 언론사에 뒤쳐지지 않기 때문일까요?
인터넷에 송고하는 경우에는 업로드 순서에 따라서 메인에 걸리느냐 마느냐도 결정되기 때문이 아닐까 감히 생각해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