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생님이 서른 명의 아이들을 위해 빵을 준비한다. 그런데 빵이 한 사람에 하나씩 돌아가지 않는다. 선생님은, 빵을 잘라서라도 똑같이 나누어 아이들에게 나누어 줄 것인지, 아이들 알아서 나눠먹도록 할 것인지를 고민한다. 빵을 똑같이 나누어 주면 아이들은 불만 없이 빵을 먹겠지만, 선생님은 그 안에서 뭔가 교육적인 움직임이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다. 모자란 빵을 두고, 누군가는 양보하고, 누군가는 설득하면서 아이들이 합리적인 방식으로 빵을 나누어 먹는 과정을 갖길 바란 것이다. 고민 끝에 선생님은 빵이 든 박스를 통째로 놔두고 교실을 나온다. 아이들이 스스로 길을 찾길 바라면서.
아이들은 어떤 기준으로 빵을 나눌지를 의논한다. 그 와중에 한 아이가, 자신은 아침에 밥을 많이 먹고 왔다며 빵을 양보하겠다고 한다. 그걸 본 어떤 아이는 한 아이를 향해서, “너도 아침에 배부르다고 했잖아. 너도 양보하는 게 어때?” 하고 말한다. 지목을 받은 아이는 크게 당황한다. 얼떨결에 그러겠다고 한다. 여러 친구들이 박수를 친다. 그러다가 또 다른 아이가 일어나서, 아침에 밥을 많이 먹고 온 누군가를 알고 있다고 말한다. 누군지 얘기는 하지 않을 테니, 스스로 양보하면 좋겠다고 말한다. 반에는 일순간 침묵이 흐른다. 서로 눈치를 본다. 많은 아이들은 속으로, 자신이 아침에 밥을 많이 먹고 온 걸 주변 친구들이 눈치 챌지를 걱정한다. 어느 새 ‘양보’와 ‘선의’는 강제되고, 강제된 양보는 빵을 나누는 방법이 된다.
이 세계는 크고 작은 무수한 사회와 공동체들이 있다. 어떤 공동체에서는 강제된 기준이 없는 상황에서도, 각자의 ‘양보’와 ‘선의’가 온전히 발현되고 그것이 서로에게 좋은 영향으로 작용해서, 법 없이도 공정한 분배가 이루어지고 서로 간의 배려가 오간다. 하지만 이런 경우는 극히 드물다. 일정한 시스템이 없는 많은 사회에서 강제된 양보가 성행하고 있다.
누구나 뉴스로 들어봤을 법한, 빙상계의 짬짜미 문화도 강제된 양보가 지속된 경우이다. 처음에는 이렇게 시작되었을 것이다. 지도자가 한 선수에게 조심스럽게 말한다. “금메달 축하해! 이번 성과로 군대 면제를 얻었으니 얼마나 좋아. 다음번엔 OO를 좀 밀어주는 게 어떨까. 너도 알다시피, 다음에 금메달 못 따면 군대를 가야할 판이잖아.” 선수는 흔쾌히 다음 대회를 출전하지 않는 방법으로 선배에게 메달을 양보한다. 이런 일이 반복되면서, 다른 선수들에게도 양보는 강제된다. 시간이 지나며 ‘양보’는 감히 거역할 수 없는 다수의 불문율처럼 되어 버린다. 그것이 옳지 않다고 여긴 선수들도 모두 동참해야 하는 법칙이 되는 것이다. 강제된 양보 문화 속에서 많은 이들이 고통 받는다.
양보와 선의의 강제가 불문율이 된 것이 비단 빙상계 뿐일까. 회사에서, 학교에서, 크고 작은 모임에서 우리는 양보와 선의를 강요받는다. 어떤 사회에서, 아주 부담스러운 일을 누군가가 맡아야 할 때, 모두가 갖고 싶은 뭔가를 여러 사람이 필요로 할 때, 울며 겨자를 먹은 사람들의 눈물이 곳곳에서 강을 이룬다.
때때로 우리는 한참 기울어진 공정의 추를 조금이나마 수평 쪽으로 가까이 두기 위해 권력자와 강자에게 양보와 선의를 강제해야 할 경우가 있다. 강제된 선의에 대한 문제 제기는 철저히 약자에게 적용되어야 한다.
우리는, 내가 몸담은 사회 속에서 관행이라는 이름으로 선의를 강제하는 일을 중단해야 한다. 누군가가 힘든 일을 해야 할 때, 묵묵히 그 일을 감내할 희생정신이 투철한 사람을 찾는 대신, 누가 그 일을 맡아도 부담을 적게 가질 수 있는 시스템을 구축하는 일에 지혜를 모아야 한다. 양보와 선의는 ‘자기 주도적’일 때 의미가 있으며, 어떤 힘에 의해 강제될 때는 껍데기에 불과하다는 걸 명확히 인식할 필요가 있다. 특히 ‘권력자’나 ‘상사’ 등 여러 이름을 불리는 많은 ‘갑’들이 이에 대한 투철한 마인드를 품고 있어야 한다.
그렇다고 ‘희생정신’이 가치가 없다거나, 이것이 아예 발휘될 수 없는 사회를 만들자는 얘기가 아니다. 아니, 우린 결코 ‘희생정신’이 필요 없는 사회를 만들 수 없을 것이다. 누군가의 마음엔 그 고귀한 정신이 계속 움트고 있다. 기회가 되면 발현될 준비를 하고 있다. 우리가 계속 모순적인 사회 시스템을 뜯어 고치고, 잘못된 관행을 바로 세운다 해도, 누군가의 (순수한, 강제되지 않은)희생과 양보는 계속해서 시스템의 빈 곳을 메울 것이다. 과거에 비해 아무리 육아 환경이 나아졌다고 해도, 아이를 향한 엄마들의 희생이 그치지 않는 것처럼 말이다. 그런 희생과 선의가 보이지 않게 이 세계를 지탱해 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하지만 희생정신을 갖자고 다짐하는 일과 끊임없이 시스템을 보완하는 일은 별개로, 다른 영역에서 진행되어야 한다.
시스템을 만들어야 하는 곳에서 ‘희생정신’을 외치거나, ‘희생정신’이 필요한 일에 사회 구조의 모순을 외치는 엇박자 모두가 많은 고통을 야기한다. 변화를 원한다면, 우리는 저마다의 자리에서, 나와 다른 이들의 고통을 줄이기 위해, 바꿀 수 있는 구조가 있는지 살펴야 하고, 아울러 내가 기꺼이 헌신할 수 있는 지점이 어디인지도 동시에 살펴야 한다. 그 두 축이 지금까지 우리 세계를 변화시키는 단초가 되어 왔기 때문이다.
짱짱맨 호출에 응답하였습니다.
감사합니다ㅎ
힘든 사람들에게 더 많이 강요되는게 강제된 양보인거 같아요.
헌신하던 사람들은 계속 헌신하고, 누리던 사람들은 계속 누리고
언젠가 조금씩 바뀔꺼라고 믿으면서 저부터 조금씩~ ^^
네 양보나 선의가 약자에 강제되곤 하지요. 실제 그걸 양보라 부를 수 있는지 모르겠지만요.
자기가 속한 곳을 돌아보는 게 필요할 듯 합니다ㅎ
li-li님이 kyslmate님을 멘션하셨습니당. 아래 링크를 누르시면 연결되용~ ^^
li-li님의 평론가들의 도서리뷰 # 63 (190316)
저 스스로도 누군가에게 (특히나 아이들에게) 강제된 선의를 강요하지 않았는지 돌아보고 반성합니다.
자발적이고 진실로 가득한 선의가 우리 삶 곳곳에 퍼졌으면 좋겠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