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사월 이십팔일

in #kr7 years ago (edited)

>_<

종일 생각해야 하는 직업을 가져서 그런지, 마라톤을 하면서 ‘저 전봇대까지만’을 마음속으로 외치며 달리는 마라토너처럼, 가까운 목표를 계속해서 달성하는 삶에 익숙해진 나는 역설적으로 아무 생각 없이 오래 걷는 것이 취미가 되었다. 이는 가장 간단하게 할 수 있는 취미 중 하나이기도 했을 텐데 요즘은 미세먼지 타령으로 마음 편히 나가기도 힘들어졌다. 사실은 나의 게으른 본능이 밖에 나가기 싫은 핑계를 대는 것일지도 모르겠지만. 오늘은 혼자가 아니니까 본능의 주장을 들어줄 생각은 처음부터 없었다.

나는 토요일 오후 2시쯤 되는 시간이 아무것도 하기 싫을 때이기도 하지만, 걷기에는 가장 좋은 시간이라고 생각한다. 나뭇잎 사이로 비치는 햇살과 부는 듯 마는듯한 선선한 바람이 다음날은 일요일이라는 사실에서 오는 안도감, 여유로움과 한데 섞였을 때만 마음이 간질간질해지기 때문이다. 마음이 간질간질할 때 보는 하늘은 날씨와 관계없이 이쁘다.

우리가 걷는 길은 등산할 때 볼 수 있는 평범한 흙길이다. 차이점은 길을 계속 따라가도 산속으로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줄곧 같은 고도에서 빙빙 둘러가게끔 되어있다. 그래서 힘든 것도 없이, 지칠 것도 없이 계속 걸을 수 있다. 눈앞에 놓인 풍경은 계속 뻗어있는 나무와 바람에 흩날려 다양한 빛으로 자신의 색을 나타내는 잎새들밖에 없다. 초점을 조금 멀리 두면 우리가 늘 지내는 곳이 보이기는 한다. 예전엔 기껏 도망쳐 나온 곳에서도 도시다운 것이 보이는 게 분위기를 깬다고 생각해서 정말 싫었지만, 지금은 저 멀리 보이는 것이 오히려 내가 떨어져나왔다는 것을 확인시켜주는 것 같아 만족스럽다.

예전과 또 다른 점은 옆에서 네가 걷고 있다는 것 정도다. 네가 처음 날 따라나서던 날은 지금 생각해봐도 웃기다. 원하는대로 프로그램이 만들어지지 않아 스트레스를 받았던 어느 날, 며칠이나 같은 생각을 하다 보니 정신이 혼미해졌었던 날. 해가 중천이라 술도 마실 수 없는 상태에서 내가 선택한 것은 산책이었다. 그땐 산책이 취미는 아니었다.

여느 학교들과 마찬가지로 우리 학교도 산을 끼고 자리하고 있었으니, 익숙한 소음에서 벗어나는 건 어렵지 않았다. 어디 가냐는 물음에 나는 그냥 앞에 걸어 다니러 간다고 대답했었던 것 같다. 내가 흙길을 찾아가고 있다는 걸 상상도 못한 채 너는 굽 낮은 구두를 신고서 졸졸 따라왔었고, 오르막을 올라 산으로 들어갈 때까지만 해도 괜찮다고 했었다. 도대체 뭐가 괜찮다고 생각하고 따라왔는지 모르겠지만 나중엔 구시렁거리는걸 보고 나는 그냥 네가 바보라고 생각했다.

그 날을 생각하고 나니 문득 네가 왜 오늘도 옆에서 걷고 있는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왜 만날 약속을 했고, 서로 별말 없이 걷고 있는 걸까. 평소보다 말 수가 더 적은 것 같아서, 그래서 어색한 기분이 들었다. 그런 기분이 되었더니 무심코 네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지, 무슨 표정일지 궁금해서 고개를 돌렸다.

얼마 전 벚꽃이 만개했던 날에, 백양산의 벚나무길 아래를 걸을 땐 너의 걸음걸이가 눈에 띄게 가벼웠었다. 뛰는 것도 아니고 걷는 것도 아닌 걸음으로 내 주위에서 앞으로 갔다 뒤로 갔다를 반복했다. 내가 떨어지는 벚꽃 잎을 땅에 닿기 전에 잡으면 사랑이 이루어진다는 미신을 알려줬을 때, 네가 그때만큼은 세상에서 가장 기운이 넘치는 사람이었을 것이다.

그런 네가 지금은 무슨 생각을 하며 가만히 앞만 보며 천천히 걷고 있는 걸까. 항상 앞만 보며 걷던 나는 왜 고개를 돌렸을까. 익숙했던 이 길의 모습에, 네 모습을 같이 눈에 담은 것을 나는 조금 후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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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이 간질간질하다는 표현이 새롭습니다. 여유로워질때를 말씀하신 것 같은데 쫄깃쫄깃, 산들산들, 살랑살랑 등 여러가지 표현들을 생각해보았습니다. 왜 간질간질하다는 표현을 쓰셨을까? 생각도 해봅니다.

마음이 여유로워지면 뭔가 생기발랄한 기운이 싹터나와서 일까?

편안하게 글을 잘 읽었습니다. 산책하는 기분도 납니다.

토요일 오후2시에 사랑하는 이와 함께 손잡고 걷는 행복만한 것도 드문것 같습니다..

마아냐님의 일기도 새로운 맛이 있군요! 자주 써주세요 ㅎㅎ

저도 미세먼지를 탓하며
밖을 나가지 않았던게 얼마나 되는지를 절로 생각나게 하네요 ㅎㅎ

감성적이고 서정적이구나 싶은 생각이 절로...

잘 보고 가요

네 모습 지금도 눈에 잘 담고 계시나요? 갑자기 궁금해집니다.

일기 투어중에 들렸습니다. 잘 읽고 갑니다.
팔로우도 같이 하고 갑니다.

자주 소통하고 들리겠습니다.

드디어......
마신봇이 연애를 하는건가요??

마신봇이 연애를......?

그냥.. 그렇게 몰아가유.... ㅋㅋㅋㅋ

이런글도쓰시는군용ㅎㅎ

와 마야나님 글 정말 좋네요..!! 읽을거리가넘쳐서참좋습니다ㅋㅋㅋ펜클럽공모전 짱..
뭐랄까.. 글이주는느낌이좋아서리스팀합니닷..👍

제 취미도 무작정 걷기. 제주에서 버스 타고 가다 괜찮다 싶으면 내려서 걷다가 차 한잔 하고 돌아오기. 그래서 올레길을 좋아하지만 올레도 복불북이라...

마야나님 걷는 길에는 향기가 있네요 :)

얼마전까지 가장 기운 넘치던 사람이 왜 지금은 가만히 앞만 보며 천천히 걷고 있을까요.
이제야 고개를 돌려서 그런걸까요.

아. 마아냐님의 이런 일기를 훔쳐 보게되다니, 일기 공모전이 자주 있었음 좋겠는데요!

당선작 점쳐 봅니다 ^^(진심)

아.... 뭔가 두근두근 거리기도 하고, 마지막 문단은 슬프기도 하고..ㅠㅠ 뭐에요~ 다음 편 써주세요.....

일기가 주는 순수한 느낌이 있네요.

얼마 전 벚꽃이 만개했던 날에, 백양산의 벚나무길 아래를 걸을 땐 너의 걸음걸이가 눈에 띄게 가벼웠었다. 뛰는 것도 아니고 걷는 것도 아닌 걸음으로 내 주위에서 앞으로 갔다 뒤로 갔다를 반복했다. 내가 떨어지는 벚꽃 잎을 땅에 닿기 전에 잡으면 사랑이 이루어진다는 미신을 알려줬을 때, 네가 그때만큼은 세상에서 가장 기운이 넘치는 사람이었을 것이다.

이 문단이 제일 좋아요. 마아냐님의 마음에도 요즘 봄이 찾아왔나 봅니다. 머릿속에서 벚꽃이 흐드러지게 떨어지면서 막 상상되는 것 있죠? ㅎㅎㅎ

후회가 이번 응모엔 좋은 성과로 되돌아 올 것 같은 걸요 홧팅요

마아냐님을 따라 나선 것이 진짜 봇이나 개일 것 같은 반전이 있을까봐 내심 불안했는데...구두를 신었다는 말에 왠지 안심입니다. 진지하게 글을 쓰시면 이렇게 멋있는 것을!

@maanya 님 혹시 10SBD 짜리 알바하실 생각 없습니까 ㅋㅋㅋ
발주자는 저에요.
부탁드릴 일이 있는데 요즘 바빠 보이셔서...

무슨 일이세요? ㅇㅅㅇ!? 개인오픈톡 주시면 됩니다. https://open.kakao.com/o/sptEOvJ