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2년의 오이는 참으로 맛있었다. 사다 먹는 오이를 먹던 사람이 누리지 못하는 상당한 맛을 느끼는 한 해였다. 수확기간이 그리 길지도 않았지만 수확하기까지 오래 걸렸다. 성공적인 농사였다고 자부한다. 봄철에 종묘상에서 10포기의 오이를 구입해 심었다. 이 10포기를 가지고 줄 매고, 순 솎아내고, 오이 수확하고, 웃거름 주면서 한 해를 보낸 것 같다. 물론 고추보다는 애를 덜 먹였지만 상당히 나를 괴롭히기도 하고 또 보람도 준 작물이었다.
이 오이가 하도 맛이 좋아 수확 초기, 그러니까 7월 초에 오이 씨앗을 사다 한 곳에 5개씩 넣어 2개만 남기고 정리해 9월까지 수확했다. 오이는 비교적 수확기간이 짧았다. 5월에 심으면 6월 중순부터 수확해 8월초에는 끝이 난다. 다른 책들을 찾아보면 수확기간이 상당히 길게 나오는데, 실제 가꾸다보면 그다지 수확기간이 길지 않다.
모종 값으로 10포기에 5,000원 씨앗 1봉지에 3,000원을 주었는데 실제로 8,000원 어치의 수확은 했는지 의문이긴 하다. 그러나 오이를 따는 보람이라든가 그 맛을 생각하면 충분하고도 남는다. 밭에서 일하다가 오이 한 개 따서 그 자리에서 먹는 것은 상당한 즐거움이고 목마름을 달래주는 청량제다.
오이는 다른 작물에 비해 병이 상당히 많고, 가꾸기가 난해한 작물이었다. 특히 덩굴 쪼개짐으로 몇 그루의 오이는 장마철에 말라 죽고 말았다. 잎마름병이라든가 미량원소 부족으로 인해 기형과가 많이 나와 어려움도 겪었다.
모종으로 키운 오이를 채종하려고 한 개를 늙혔다. 그것을 60일 정도 지나서 속을 갈라 보았다. 그런데 기대하던 씨앗을 흰 살 속에 품고 있지 못했다. 뭣 때문인지 몰라도 늙은 오이 속에 들어있어야 할 씨앗이 영글지 못한 채 그냥 어린 씨앗으로 남아 있었다. 그래서 2002년의 오이 씨받기는 실패로 끝이나 버렸다.
2003년 이른 봄에 아버지께서 오이 씨앗을 좀 주셨다. 이것을 4월 말에 세 군데 파종했다. 처음에는 그렇게 더디게 자라나 싶었는데 5월이 되어 날씨가 좋아지면서 금방 줄기가 뻗고 꽃이 피고 열매를 맺는다. 그렇게 기쁠 수가 없다. 오이는 대를 잘 세워주고 중간에 너무 뻗어나는 줄기를 잘라 주면 대체로 잘 자란다. 작년에 모종 사다 키우던 것에 비하면 엄청난 수확과 오랫동안 오이를 따먹을 수 있게 해준다. 오이가 한참 수확되는 7월 중순에 퇴비를 한 삽씩 떠다 줄기 주변을 약간 파고 묻어준다. 그리고 1개월쯤 지나서 다시 한 삽을 더 준다. 그러면 오이는 거기에 보답이라도 하듯이 많은 기쁨을 맛보게 한다.
오이는 직파와 모종으로 길러 이식하는 두 가지 방법으로 기를 수 있다. 직접 파종해 기르는 경우는 파종할 장소를 먼저 선정한 다음 파종 장소를 40㎝ 정도 깊이로 파서 그 자리에 먼저 대를 세우고 파종을 해야 나중에 덩굴 유인이 쉬워진다. 대를 세울 때는 합장식으로 세우는 것이 바람의 저항에도 강하고, 관리도 편리하다. 이랑 폭을 120㎝ 정도로 잡고 80㎝ 간격으로 굵은 대를 세워 맞은편의 대와 묶어 준다.
대를 묶을 때 제일 꼭대기에 긴 막대를 가로로 대어 묶고 대와 대 사이의 빈 공간은 좀 가는 나무 또는 봄에 전지한 나뭇가지를 묶어 오이가 잘 유인되게 해준다. 이 유인대의 아랫부분에 5개의 오이씨를 10㎝ 간격으로 넣고 5㎜ 정도 흙으로 덮고 물을 주면 일주일 뒤에 싹이 튼다. 그러면 20일 정도 있다 튼튼한 포기를 한두 개 남기고 솎아 내거나 다른 장소에 옮겨 심는다.
모종을 길러 이식하는 것도 대를 세우는 방법은 동일하며, 다른 장소에서 모를 길러 본잎이 2~3장일 때 한두 포기씩 유인대 아래에 심으면 된다. 직파의 경우는 완숙된 퇴비를 한 삽 가득 넣어 흙과 잘 섞이게 해 파종을 한다.
주말농장에서는 모종을 기르는 편이 좋을 것이다. 봄철에는 상추, 열무, 쑥갓 등의 작물로 빈 밭이 귀할 때이기 때문에 좁은 장소에서 미리 모종을 기르다가 상추, 열무 등을 정리하고 그 자리에 옮겨 심으면 밭을 효율적으로 활용할 수 있어 좋다.
밭에서 일하다 목마르고 지치면 물을 한참 틀어 손이 시리도록 찬물이 나오면 그것을 큰 물통 한가득 받아 그 안에 오이, 토마토, 참외 몇 개를 넣어 두었다 꺼내 먹으면 갈증도 해소되고 해거름의 배고픔도 달래준다. 여름철에 땀으로 목욕을 하고 나서 오이를 한입 베어 물면 싱그러운 이 맛에 텃밭을 하나보다 하는 생각이 든다.
오이를 좋아하는 집에서는 6월 중순경에 다른 장소를 마련해 또다시 4포기 정도를 키우면 서리가 내리는 날까지 날마다 2~3개의 오이를 선물받을 수 있다. 오이를 잘 길러 늦게까지 고른 수확을 하려면 4월, 5월, 6월의 한 달 간격으로 파종한다. 그러면 4월에 파종한 오이가 끝물이 되어 가는 때에 5월에 파종한 오이를 수확하고 그것이 끝물이 되면 6월 파종한 것이 수확을 가능하게 해준다.
처음에는 그렇게 키우기 어렵던 오이가 아버지께서 주신 종자를 키우면서는 정말 키우기 편하고 잔손이 덜 갔다. 이렇게 수확이 좋은 작물이라는 걸 깨달았다. 이제는 봄이 되면 밭의 이곳저곳에서 작년에 떨어진 오이 씨앗이 절로 싹이 터서 거름더미, 풀 사이를 올라 열매를 맺는다. 오이를 좋아하는 보통의 4인 가족이라면 2~3포기만 키워도 충분하다. 이웃과 나누고 김치도 담고 하려면 5~6포기면 된다.
열매를 맺는 것 중에 종자용 오이를 1~2개 키워서 씨앗을 받으면 연속적인 재배가 가능하다. 채종의 어려움이라고 하면 채종용 오이는 대체로 40~50일 정도 있어야 하는데 그 와중에 비 맞고 해 약간은 갈라지는 수도 있고 오랫동안 줄기에 매달려 있으면서 내부에 벌레가 생기는 경우가 있다. 채종용 오이를 칼로 갈랐을 때 가끔은 내부에 애벌레가 꿈틀대는 광경이 펼쳐진다. 징그러우면 이쑤시개로 오이씨를 하나하나 끄집어내어 그늘에 잘 말린 다음에 보관한다.
모종을 구입해 기르는 오이와는 맛도 틀리고, 비용도 덜 든다. 또다시 채종도 가능하고 수확도 좋고 병충해에도 강하고 여러모로 장점이 있다.
내 고향에서는 오이를 물외라 했다. 내 어릴 적에 집에서 가까운 밭둑에는 가지가 가늘고 큰 줄기가 없는 뽕나무가 자라고 있었는데 아버지는 거기에 해마다 물외를 몇 줄기 올리셨다. 여름에 입맛이 없을 때나 반찬이 시원찮을 때 나보고 물외를 몇 개 따오라 심부름을 시킨다. 얼른 가서 좀 맛있게 익었다 싶은 걸 따다 놓으면 이번에는 샘에 가서 시원한 물 한 주전자 떠오라신다.
집에서 300m 정도 떨어진 샘에 가서 물을 떠오면 미리 불려둔 미역을 넣고 물외를 잘게 썰어 냉국을 해주셨다. 얼음 같은 건 넣을 수도 없었지만 얼음이 동동 떠있지 않아도 샘물은 시원했다. 그 당시에는 샘물보다 시원한 것이 우리 동네에는 없었다. 그보다도 그때는 오이도 참으로 귀한 먹을거리였다. 잔손질이 많이 가서 곡식을 기르면서 여벌로 재배하기에는 시간이 너무 많이 드는 작물이다. 오이를 직접 길러보고 나서야 왜 그 당시에 오이조차도 밭 귀퉁이에 많이 심지 못했는지 이유를 알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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