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이야기는 2015년 1월 2일부터 2016년 4월 16일까지, 1년 4개월간 서른일곱의 반 백수 철학자 프로복서가 되기 위해 발버둥 쳤던 이야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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합리적인 선택을 하고 살아왔습니다. ‘딴 생각 말고 공부나 해’라는 말을 믿고 합리적으로 착실히 공부했습니다. ‘공대가면 밥벌이는 한다’는 이야기를 믿고 합리적으로 공대에 입학했습니다. ‘대기업이 최고야!’라는 믿고 합리적으로 취업을 했습니다. 서른 너머까지 세상 사람들의 이야기를 믿고 합리적인 선택을 하며 살았습니다. 누구보다 삶을 잘 살고 있다고 믿었습니다. 그런데 직장 생활 7년, 우울증이 찾아왔습니다. 그 흔한 사춘기 한 번 겪지 않고 지냈는데, 우울증이라? 생전 처음 겪어보는 나 자신의 상태에 혼란스러웠습니다.
그보다 더 혼란스러웠던 건, ‘나처럼 삶을 잘 살고 있는 사람에게 왜 우울증이 찾아왔을까?’라는 질문이었습니다. 밤 10시, 붐비는 지하철 2호선, 여느 날과 다름없는 퇴근길이었습니다. 이유를 알 수 없는 눈물이 왈칵 쏟아졌습니다. 의미 없는 업무, 함께 있지만 더 외로운 인간관계 속에서 삶이 질식해가고 있었던 거였습니다. 깜깜한 원룸 문을 열고 불도 켜지 않은 채 침대에 누웠습니다.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내일 눈 뜨지 않으면 내일 회사 가지 않아도 되겠지’ 더 끔찍한 생각이 들기 전에 선택을 해야 한단 걸 직감했습니다.
회사를 그만뒀습니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비합리적인 선택을 했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다들 ‘그 좋은 직장을 왜 그만 두냐?’며 제 선택을 뜯어 말렸습니다. 당연했습니다. 그건 비합리적인 선택이었으니까요. 좋아하는 철학자의 책 제목처럼 인생은 ‘일방통행로’입니다. 한 번 길에 들어서면 되돌아갈 수 없지요. 그래서였는지, 세상 사람들은 애가 둘인 가장이 이제 무엇을 하며 먹고 살고 건지 물었습니다. 다시 세상 사람들은 나름, 합리적인 선택을 요구했습니다. 이직, 창업, MBA 같은 퇴사 후 합리적인 너무나 합리적인 선택들 말입니다.
작가가 되기로 했습니다. 늦게 배운 도둑질이 밤새는 줄 모른다고 더욱 비합리적인 선택을 했지요. 어린 시절 글짓기로 상 한 번 받아본 적 없고, 글쓰기는커녕 글 읽기도 제대로 해본 적이 없었습니다, 그런 사람이 글쟁이가 되겠다니, 아주 비합리적인 선택을 한 셈이었지요. 친구, 선배, 동료, 부모 등등 세상 사람들은 제 선택에 대해 하나 같이 말했습니다. “미쳤냐?” 이해도 됩니다. 작가로 산다는 건 최소한의 밥벌이도 못할 수 있는 너무나 비합리적인 선택이었으니까요. 몇 권의 책을 냈습니다. 그 책 때문에 TV에 몇몇 얼굴을 비춘 적이 있습니다. 이제 세상 사람들은 나름 자리를 잡은 거라며 합리적으로 그 길로 계속 가라고 합니다.
철학자가 되기로 했습니다. 또 비합리적인 선택을 했습니다. 어느 출판사 대표가 그러더군요. “자기계발서 계속 하시면 될 텐데, 왜 철학 쪽으로 가려고 하세요?” 제가 쓴 철학 관련 출판을 거절하면서 한 이야기였습니다. 맞습니다. 저는 철학을 전공을 한 것도 아니고 정식으로 누구에게 철학을 배운 적도 없습니다. 독학 반, 야매 반으로 철학을 공부했지요. 책을 내는 것 자체가 힘든 것이 지금 출판 현실인데, 근본도 없는 야매가 철학으로 책을 내겠다니, 어느 독자 어느 출판사가 관심을 가져 주겠습니까? 이보다 더 비합리적인 선택도 없었을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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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 복서가 되기로 했습니다. 비합리적인 선택으로 치자면 이번 끝판왕 쯤 될 겁니다. 주위 사람들은 이제 ‘미쳤냐?’는 이야기도 하지 않습니다. 아마 포기한 걸 겁니다. 말해봐야 듣지도 않고, 또 어떻게든 살아간다는 걸 받아들였기 때문일 겁니다. 생각해보니 제가 생각해도, 참 황당한 삶입니다. 직장인, 작가, 철학자, 프로복서. 이런 삶에는 어떤 공통점도 없기에 너무나 비합리적 삶입니다. 어찌 보면 무책임하게 보이기도 합니다.
직장을 그만둔 것. 글쟁이로 살기로 한 것. 철학자가 되기로 한 것. 마흔을 앞둔 남자가 한 선택입니다. 이보다 더 비합리적인 선택도 없을 겁니다. 그 모든 선택은 분명 비합리적이었습니다. 직장을 그만둔 후 삶은 더 불투명해졌고, 글쟁이로 살기로 한 뒤 삶은 더 궁핍해졌고, 철학자로 살기로 한 뒤 삶은 더욱 외로워졌으니까요. 하지만 비합리적인 선택을 이어오면서 하나 확신하게 된 것이 있습니다. 그건 행복해졌다는 것입니다.
한때 편한 삶이 행복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안정적이고 익숙한 삶을 유지하며 편안하게 사는 것이 행복이라 믿었습니다. 그것이 아마 세상 사람들이 말하는 행복일 겁니다. 만약 그것이 행복이라면 합리적인 선택을 이어가며 사는 것이 행복으로 가는 가장 확실한 방법입니다. 합리적인 선택은 언제나 안정적이며 익숙한 삶을 유지하려는 선택이니까요. 하지만 비합리적인 선택을 해온 저는 지금 압니다. 진정한 행복은 합리적인 선택이 아니라 비합리적인 선택에서 온다는 걸요.
행복은 무엇일까요? 그건 다양한 삶을 경험하며, 삶의 지평을 넓혀 나가고, 닥쳐오는 삶의 문제들 앞에서 강건하게 맞서나갈 때 얻게 되는 걸 겁니다. 안정되고 익숙한 삶은 편안하겠지만 행복하지는 않습니다. 그런 삶의 끝에는 필연적으로 ‘그때가 그걸 해봤어야 했는데’라는 후회가 남기 때문입니다. 행복해지지 못하는 이유는 분명합니다. 비합리적인 선택을 할 용기가 없어서입니다. 자신의 삶에 맞설 용기가 없기에 늘 합리적인 선택 속에 갇혀 지내는 걸 겁니까. 한동안 제가 그리 살았던 것처럼 말입니다.
어린 시절, 프로복서가 되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그건 너무나 비합리적인 선택이었기에 오래시간 도망쳐왔습니다. 더 늦기 전에 도망쳐왔던 그 꿈을 이루고 싶습니다. 프로복서, 그건 너무 도망쳐 왔기에 꿈이 아니라 차라리 저에게 들러붙은 저주에 가깝습니다. 이제 그 저주를 풀고 다시 앞으로 나아가고 싶습니다. 그래서 다시 한 번 비합리적인 선택을 하려 합니다. 용기를 내어 꿈을 이루고 저주를 풀고 싶습니다. 그 과정에서 다양한 경험을 하고, 삶의 지평을 넓혀나가고, 닥쳐오는 삶의 문제들 앞에 강건하게 맞서고 싶습니다. 그렇게 조금 더 행복한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이 글을 시작하며 여러분께도 묻고 싶습니다. 여러분의 가슴 속에 묻어두었던, 너무나 간절했기에 애써 그걸 부정하고 은폐하며 살 수밖에 없었던 꿈은 무엇인가요? 현실적 문제들 때문에 도망쳐왔던 꿈은 무엇인가요? 너무나 선택하고 싶었지만 비합리적이었기에 하지 못했던 선택은 무엇인가요? 더 늦기 전에 비합리적 선택을 단 한번이라도 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바라건대, 서른일곱에 프로복서에 도전하는 비합리적인 사람의 이야기가 여러분께 작은 용기를 전해줄 수 있었으면 합니다.
행복을 찾기 위해 다양한 선택들을 하셨네요.
일을 그만 두고, 작가가 되고, 철학자가 되고, 프로 복서가 되면서,
차차 행복해지셨겠죠?
철학자 프로 복서는 어떻게 지냈을 지도 궁금하네요.
팔로우 하고 가겠습니다.^^
깊은 감동을 받았습니다.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