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네이버 영화)
가슴 속에 타오르는 분노를 안고 있는 사람이 있다. 그것도 누군가에 대한 원한으로 인한 분노다. 이 사람을 어떻게 해야 할까? 평화에 대한 노래를 한 100곡 쯤 불러주면 나아질까? 조물주께 기도를 하며 마음을 가다듬어 보라고 훈계라도 한다면? 당신의 한쪽 뺨이 얼얼해지며 벌겋게 부어오르는 참사가 벌어질 수도 있다. 아니면 그 망할 인간에게 화끈하게 복수를 하라고 부추겨 볼까? 물론 싫다 하지 않겠지만 당신은 필경 그 사람을 범죄자로 만드는데 큰 역할을 하게 될 것이다.
가슴 속 분노는 쉬이 사그러들지 않는다. 분노의 불길은 그 근원이 살아있는 한 끊임없이 타오른다. 이것은 전염성이 높아 옮겨붙기도 쉽다. 그래서 분노는 위험하고 대단히 조심스럽게 다루어져야 하는 감정이다. 많은 인류사의 비극은 잘못 다루어진 분노로부터 촉발되었다.
마리 앙트와네트의 사치는 과중한 세금에 시달리던 민중의 분노에 기름을 부었다. 결국 그녀는 단두대의 이슬로 사라진다. 세월호에 대한 박근혜의 책임 회피와 거짓말은 사람들의 마음 속에 분노를 쌓았다. 최순실의 국정농단이 사실로 밝혀지자 이것은 기폭제가 되어 한겨울에 시민들을 거리로 쏟아져 나오게 만들었다. 그녀 역시 권좌에서 쫓겨나 영어의 몸이 됐다. 이처럼 해소되지 않은 분노는 사람들의 마음 속에 쌓이고 그것은 언젠가 폭발하게 된다. 쌓인 분노는 타이머가 작동하기 시작한 시한폭탄과 같다.
(출처 : 네이버 영화)
영화 '쓰리빌보드(Three Billboards)'는 한 분노한 여인이 시 외곽에 세워져 있는 대형 광고판을 바라보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그녀의 이름은 밀드레드 헤이즈(프란시스 맥도맨드분).. 얼마 전 강간살인으로 딸 안젤라 헤이즈를 잃었다. 그녀에게는 꿈에서도 잊을 수 없는 딸의 죽음이었지만 세상은 참으로 무심했다. 범인이 흔적을 거의 남기지 않은 탓에 경찰은 수사의 어려움을 겪고 사건은 유야무야 되고 만다. 시간이 흐르고 세상은 곧 이 사건을 잊었다. 그러나 어머니 밀드레드는 잊을 수 없었다. 그녀는 지금 눈 앞의 이 광고판 세 개를 딸의 죽음을 다시 알리는 수단으로 사용하기로 한다.
며칠 후 이 광고판에는 이 영화의 배경이 된 에빙시를 떠들썩하게 만들 광고가 게재된다. 그것은 세 개의 문구였다.
"Raped while dying"
"And still no arrests?"
"How come chief Willoughby?"
그녀는 이 광고를 통해 강간살인을 벌하는데 소극적인 공권력을 질타하고 있었다. 현직 경찰서장인 윌러비(우디 헤럴슨분)의 이름까지 거론하면서 말이다. 이 광고는 에빙시를 발칵 뒤집어 놓는다. 문제의 이 광고는 연일 방송을 타게 되고 윌러비는 어떤 식으로든 밀드레드의 책임 추궁에 답을 해야 하는 상황에 내몰린다.
(출처 : 네이버 영화)
결국 윌러비는 밀드레드를 찾아가게 된다. 그는 그녀를 만나 자신이 췌장암 말기임을 알린다. 그러나 그녀는 이미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녀는 윌러비가 괜찮은 사람이라는 것도 알고 있었다. 그녀가 광고에서 그의 이름을 들먹인 것은 다분히 의도적인 행위였던 것이다. 이를 확인한 윌러비는 처음에는 당황하지만 곧 그녀의 심정을 이해하게 된다. 그는 그녀를 돕기로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에게는 시간이 없었다. 갑작스러운 병세 악화로 그는 재수사를 중단할 수밖에 없게 된다. 그는 죽음이 바로 목전까지 왔음을 직감한다. 하지만 그는 항암치료로 가족을 괴롭혀가며 죽은 것이나 다름 없는 삶을 이어 붙이길 원치 않았다. 그는 스스로 삶을 마감하기로 결심한다. 그리고 밀드레드에게는 꽤 근사한 선물을 하나 주기로 한다.(그 선물이 무엇인지 궁금하다면 직접 영화를 보시라.. ) 얼마 후 윌러비는 자신의 집 마굿간에서 권총으로 자살한다. 그러나 이 사건은 그의 의도와는 달리 또 다른 분노를 유발한다.
윌러비의 오른팔이었던 딕슨(샘 록웰분)은 윌러비의 죽음이 밀드레드가 세운 세 개의 광고판 때문이라고 오해한다. 원래 단순무식했던 그는 폭주를 거듭하고 그로 인해 그는 경찰관의 신분을 잃게 된다.
제대로 케어되지 않은 분노가 또 다른 분노를 유발하는 이 장면은 참으로 의미심장하다. 우리는 그렇게 생각하기 쉽다. 밀드레드 같은 피해자들의 분노를 신문기사에서 읽고는 딱하긴 하지만 남의 일일 뿐이라고.. 그러나 정말 그런가? 그것은 정말 우리와 아무런 상관이 없는 일일까?
(출처 : 네이버 영화)
딕슨의 폭주는 또 다른 피해자를 만들어내고 그 자신마저도 피해자로 만들고 만다. 이것은 연쇄반응으로 이어지기 쉬운 분노의 폭발적 속성을 잘 보여준다. 밀드레드의 광고판에서 촉발된 분노의 폭주는 여러 명의 피해자를 양산하고만 것이다. 그래서 어떤 사회에서 생겨난 분노는 사회 전체의 문제로 간주되고 다루어져야 한다. 그것이 그냥 방치됐을 때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이 영화는 아주 세밀한 연출로 보여준다.
그렇다면 분노는 어떻게 다루어져야 할까? 분노라는 불길을 잡으려면 진심과 공감이 필요하다. 이 영화에서 밀드레드에게 진심으로 다가간 첫번째 인물은 윌러비 소장이다. 그는 밀드레드가 광고판에 자기 이름을 올려 곤란한 지경에 처했음에도 그녀를 이해하려 노력한다. 어떻게든 그녀가 납득할 만 한 결과를 내야겠다고 생각한다. 과연 그는 사람들에게 존경 받을 만 한 사람이었다. 그러나 그에게는 시간이 없다. 그래서 그는 자신의 임무를 대신 수행할 인물로 딕슨을 지목한다.
(출처 : 네이버 영화)
이 영화에서 딕슨은 중요한 인물이다. 그는 유일하게 캐릭터 변화를 겪게 되는 인물이기도 하다. 윌러비는 단순무식하기 짝이 없는 그에게 순수한 면이 있음을 알아본다. 그런 그가 밀드레드의 아픔에 공감할 수 있을거라 생각한 윌러비는 죽기 전 그에게 편지를 남긴다. 밀드레드가 불을 지른 경찰서 내부에서 그가 윌러비의 편지를 읽는 장면은 이 영화의 코어씬이다. 그는 타오르는 불길 속에서 편지를 읽고 밀드레드의 아픔에 공감할 수 있는 인물로 탈바꿈한다.
이 영화는 타오르는 분노를 잡는데 대단한 뭔가가 필요치 않다고 말한다. 진심과 공감, 이 둘만으로도 충분히 그 불길을 잡을 수 있다고 말한다. 스포일러긴 하지만 엉성한 딕슨은 끝내 범인을 잡지는 못한다. 그러나 이 결말은 매우 상징적이다. 원하는 결과를 가져오지는 못하지만 딕슨의 진심과 공감이 결국 밀드레드의 상처를 치유하기 때문이다.
영화 '쓰리 빌보드'는 분노에 관한 탁월한 메시지를 담고 있는 영화다. 그리고 방치된 분노가 왜 위험한 것인지, 또 그것이 어떻게 다루어져야 하는지를 잘 보여준다. 불금과 주말을 책임질 영화로 손색이 없다.
개인적인 사견이지만 이런 우수한 영화가 국내 상영관의 독과점 때문에 많은 관객들과 만나지 못하는 것은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그러나 지금은 IPTV와 유튜브가 있다. 대형스크린을 갖춘 상영관은 아니더라도 저렴한 가격에 훌륭한 영화를 볼 수 있 는 환경과 여건이 구축되어 있다.
맞아요~ 보고 싶어도 상영관을 찾아 검색해
찾아가 보던 때도 있었는데 좋은 작품 소개해
주시니 찾아보기만 하면 되는 좋은 세상이죠^^
요새는 조금 기다렸다가 IPTV나 유튜브에서 보게 되는 경우가 많은 것 같아요..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