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서 가장 무거운 싸움, 김승희

in #kr7 years ago (edi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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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요일의 페미니즘, 여는강연을 맡은 고정갑희 교수님께 혹시 우리에게 권하고픈 시가 있다면 소개해주십사 부탁했습니다.

강연자는
"어쩌면 제 강의보다 이 분의 시 한 편이 더 큰 울림을 줄지도 모르겠습니다."
라고 덧붙이며 김승희 시인의 《세상에서 가장 무거운 싸움》을 소개해줬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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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서 가장 무거운 싸움》, 김승희, 세계사, 1995년
1952년 광주 출생
서강대학교 영문과, 동대학원 국문과 졸업

이 시집은 절판되었고, 도서관에서도 책을 찾기 어려웠습니다. 중고서적을 구하려고 봤더니, 뭐? 5만원을 부른 이도 있더군요.

교수님이 직접 낭송을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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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적

그런데 그 여자
하루종일 세끼 밥 부엌일에 두 아이 기르고
빨래 청소 층층시하 시어른 봉양에
비 오는 날도 안 쉬고 일요일 날도 못 쉬고
일당 만 원은커녕
무료라네.

'일당'을 '시급'으로 고쳐 읽어보았습니다. 무려 20년 전 작품인데, 그렇더라도 지금, 한치의 이질감이 없습니다.

또 한편, 표제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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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서 가장 무거운 싸움 2

아침에 눈뜨면 세계가 있다,
아침에 눈뜨면 당연의 세계가 있다,
당연의 세계는 당연히 있다,
당연의 세계는 당연히 거기에 있다,

당연의 세계는 왜, 거기에,
당연히 있어야 할 곳에 있는 거처럼,
왜, 맨날, 당연히, 거기에 있는 것일까,
당연의 세계는 거기에 너무도 당연히 있어서
그 두꺼운 껍질을 벗겨보지도 못하고
당연히 거기에 존재하고 있다

당연의 세계는 누가 만들었을까,
당연의 세계는 당연히 당연한 사람이 만들었겠지,
당연히 그것을 만들 만한 사람,
그것을 만들어도 당연한 사람,

그러므로, 당연의 세계는 물론 옳다,
당연은 언제나 물론 옳기 때문에
당연의 세계의 껍질을 벗기려다가는
물론의 손에 맞고 쫓겨난다,
당연한 손은 보이지 않는 손이면서
왜 그렇게 당연한 물론의 손일까,

당연한 세계에서 나만 당연하지 못하여
당연의 세계가 항상 낯선 나는
물론의 세계의 말을 또한 믿을 수가 없다,
물론의 세계 또한
정녕 나를 좋아하진 않겠지

당연의 세계는 물론의 세계를 길들이고
물론의 세계는 우리의 세계를 길들이고 있다,
당연의 세계에 소송을 걸어라
물론의 세계에 소송을 걸어라
나날이 다가오는 모래의 점령군,
하루종일 발이 푹푹 빠지는 당연의 세계를
생사불명, 힘들여 걸어오면서, 세상에서 가장 무거운 싸움은

그와의 싸움임을 알았다,
물론의 모래가 콘크리트로 굳기 전에
당연의 감옥이 온 세상 끝까지 먹어치우기 전에
당연과 물론을 양손에 들고
아삭아삭 내가 먼저 뜯어먹었으면.

엄청난 시입니다.
당신은 이렇게 모순적인 세계가 당연하다듯 굴러가는 것이 낯설지는 않으셨던가요? 물론의 세계에 발딪고 버텨내는 삶이 버겁지는 않았던가요?
언어가 있습니다. 여운이 길게 남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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