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전쟁이 발발하자 마자 중국은 곧바로 군사적 대비책을 강구했다. 모택동의 제의로 7월 7일과 10일 중앙군사위원회는 두번의 회의를 소집했다. 중앙군위 부주석 주은래 주재하에 동북변방군 조직 문제를 토론했다.
7월 13일 중앙군위는 ‘동북변방보위에 관한 결정’을 내려 하남, 광동, 광서, 호남, 흑룡강 등지에 배치되어 있던 제13병단의 38, 39, 49군과 42군, 포병 1,2,8사단, 1개 고사포 연대, 1개 공병연대 등 모두 25만 5천 명을 뽑아 동북변방군을 조직했다.
8월 중순 상술한 부대가 안동(지금의 단동), 봉성, 집안, 통화, 요양, 해위, 본계, 철령, 개원 등지에 집결완료하고 정비및 훈련에 들어갔다.
9월 6일 중앙군위는 제50군을 호북에서 동북지구로 이전, 변방군 서열에 포함시켰다.
8월 하순 군위는 총참모장을 대리하던 섭영진의 건의에 따라 상해지역의 9병단과 수북지구의 제19병단을 각각 진포, 용해 양 철로변에 파견하여 동북변방군을 돕도록 함.
중앙군위는 지원부대 건설을 가속화시키는 결정을 내리고 즉시 4개 비행연대, 3개전차여단, 18개 고사포 연대 및 10개 군소곡 포병을 증편시켰다.
중앙군위는 대도시와 공업기지의 안전을 보장하기 위해 방공계획을 제정하고 3개 항공사단, 15개 고사포 연대, 1개 탐조증 연대를 심양, 안산, 본계, 북경, 천진, 남경, 상해, 항주, 광주 등지에 나누어 배치했다.
동북지구 남부의 공업설비와 전략 비축물자를 북부로 옮겼다.
8월 20일 주은래 총리 겸 외교부장은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및 유엔 의장에게 전보를 보내, 조선문제를 평화적으로 해결하자는 소련의 제안을 지지하며, 조선에서의 군사행동을 중지하고 조선으로부터 외국군 철수를 요구했다.
8월 하순 미국공군은 중국의 동북영공을 침범하여 안동, 집안 등의 도시 및 농촌에 폭격을 가했다.
주은래는 유엔 안보리 및 유엔 사무총장에게 전보를 보내 미국이 중국 영토인 대만을 강점하고 미국 공군이 중국 영공을 침범하는 것을 규탄했다.
이 당시까지는 북한군의 신속한 승리가 예견되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이미 중국은 미국의 개입으로 한국전쟁이 장기화될 가능성에 대한 준비를 진행하고 있었다.
@tipu cur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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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나쁜놈들....
북한 중국 미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