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외여행(3)

in #novel7 years ago

세번째 이야기 _ 기쁜 유혹

한쪽에 서류가 잔뜩 쌓여 있다. 복사기는 열을 내뿜으며 쉴 새 없이 돌아가고 종이는 나와서 잔뜩 쌓여간다. 숨이 턱턱 막힌다. 시원한 바람이 나와야 할 에어컨 앞에는 『고장』 이라는 문구가 적힌 A4용지만 딸랑 붙어있다. 연신 이마에서 흘러내리는 땀을 셔츠로 훔친다.

“많이 힘들지.”
어느새 옆에 와있던 차현선 대리가 손수건으로 이마에 땀을 닦아주며 홍삼드링크를 손에 쥐여준다. 그녀의 손수건에서 샤넬 No.5의 냄새가 난다. 아니 온 몸에서 향수냄새가 진동하는 것 같다. 후각이 나를 혼미하게 만든다.

은은한 광택이 나는 검은색 원피스를 입고 계란형 얼굴에 동그란 뿔테안경을 낀 모습이 무척 고혹적으로 느껴졌다. 한편으로는 커리어 워먼에게서만 느낄 수 있는 뭔지 모를 섹시한 뇌색녀의 모습이랄까? 어깨에서 한줄로 가슴 깊숙이 이어지는 실루엣은 그녀의 튀어나온 유두를 살짝 가려주었고, 등뒤로 이어지는 브라우스의 깊은 선들은 안이 보일 듯 말 듯 서로 교차하며 이어져 보는 상대방을 어지럽게 만들었다. 30대 중반이라는 나이를 무색하게 할 정도로 탄력있게 위로 향한 힙과 미끈한 다리의 비율이 좋아 보였다. 월급을 모두 외모관리에 투자한 건 아닐까?

헉! 나도 모르게 숨이 가쁘게 쉬어진다. 그녀가 나의 눈을 바라보고 있다. 보는 눈길에 어떤 강열한 열망이 느껴진다고 할까? 욕구일수도 있다.
“홍삼, 잘 마시겠습니다. 저... 차대리님! 사무실에서 시킨 일을 해야 해서요.”
이 상황에 내가 할 수 있는 말이라는게 이 정도라는 것에 나 자신을 용서할 수 없다. 차대리와 함께 있으면 정신이 혼미하다. 눈을 보고 있으면 빨려 들어갈 것 같고, 이런 나 자신의 속마음이 들킬까 두렵다. 그냥 하던 일이나 하는 게 낮겠다.
“응...”
차대리가 잠시 아쉽다는 듯 비음이 섞여있는 한숨소리를 내고는 나를 계속 보고 있다. 꼬고있는 다리 방향을 천천히 큰 원을 그리며 바꾸더니, 내 옆에 바짝 붙어서 말을 다시한다.
“도현아! 내가 누나처럼 생각되서 그러는데 편하게 이름 부를께. 괜찮아?”
“네.”
“박부장, 너한테는 어떻게 잘해줘?... 혹시 괴롭히지는 않아?”
“네...”
그녀를 자세히 보니 오똑 솟은 코위에 작은 점이 있어 너무 귀엽다. 볼수록 매력있다.
“아휴! 어떻게 이런 부서로 우리 도현이처럼 착한 신입직원을 보냈을까? 정말 걱정되네. 2달이나 가려나. 전에 있던 신입도 얼마 못 버텼는데...” 말끝을 흐리며 애처로운 표정으로 나를 바라본다.
그리고 뭔가 중얼거린다.

나는 얼굴이 후끈 달아올랐다. 그녀가 다리를 계속 바꾸어 꼬고, 몸을 계속 흔들때마다 가슴에 희고 뽀얀살이 살짝 흔들린다. 어디에 눈을 두어야 하는지 모르겠다.
“열심히 하겠습니다.” 무심결에 할말이라곤 이것밖에 없다.
갑자기 민정이의 얼굴이 떠오른다.
‘대학 때부터 벌써 6년째 사귀고 있는데 약해지면 않돼! 버텨야 한다. 그래 내년엔 결혼해야지. 꼭! 민정아!’ 그런데 갑자기 다리 힘이 빠진다.
차대리 흔들거리는 머릿결을 현악기로 튕기듯이 매만지고 있다.
“그래 열심히 하면 심하게 뭐라고 하지는 않을 거야. 박부장이 좀 모나고 안 좋을지는 모르지만, 지내다 보면 나름 의리도 있어.”

‘맞다. 내가 잘하는데 뭐가 상관있겠어. 잘못되는 사람들은 다 지들이 문제가 있는 거지.’
이렇게 마음을 가다듬고 있는데, 차대리 무언가 생각나는 듯 입술을 실룩데고, 얼굴이 점점 일그러진다. 그녀의 성숙한 아름다움 뒤로 이런 또 다른 모습을 보니 놀랍다.
갑자기 머리를 휙 돌리자 그녀의 머리칼이 내 코 앞으로 스치고 샤넬 향수의 강한 냄새가 나의 후각세포를 파괴시킨다.
“쾅!”, 차대리가 갑자기 갖고 있던 결재판을 확 집어던진다. 짜증이 극도에 다다른 것 같다.
“아! 박부장. 이 인간 생각만 하면 속에서 울화통이... 으, 으억.”
토하듯 혼자 절규하는 차대리의 분노에 가득 찬 모습을 보니 내가 힘이 빠진다.
“내가 그 인간한테 얼마나 기막힌 일을 당했는지 너도 한번 내 얘기 좀 들어봐.”

흥분한 그녀의 눈은 과거 기억을 하나하나 떠올리기 위해 허공을 향해있고, 빨간 립스틱을 바른 매끄러운 입술은 용이 불을 뿜어내듯 말을 토해내기 시작한다.
“박부장이 딴 대기업에서 스카웃되서 여기에 처음 왔을 때야. 집 사정 얘기를 들어보니 애 하고 와이프를 미국에 보내 놓고 혼자 사는 기러기 아빠라고 하더라구.”
“아아. 그럼 박부장님은 대기업에서 스카웃되서 오신거에요?”
“응. 그렇지 대기업에서 왔지. 그래도 혼자사는 처지에 저녁밥도 못챙겨 먹을 거 같아서 나름 생각해준다고, 과회식 하는데 같이 가자고 했더니...”

그 뒤에 얘기는 이렇다. 차대리는 박부장을 불쌍히 여겨, 직원들 밥 먹는데 함께 하자고 했는데, 이 놈의 박부장이 애교(?)를 부리며 다가간 우리 차대리에게,
“야근이나 하지 뭔 회식이야!”라며 무안을 주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차대리 나름 욱하는 성질 발동하여 끝까지 박부장을 붙잡고 같이 회식을 가자고 아양떨며 계속 매달렸고, 박부장은 일할 거 많으니 야근해야 한다며, 너희들끼리 잘 먹고 잘살라고 욱박지른 것이다. 이렇게 서로 붙잡고 옥신각신하며 밀고 땡기는 상황에서, 순간 몸이 엉키며 서로를 끌어안게 되는 이상한 일이 발생했고, 박부장과 차대리는 순간 어떻게 할줄 몰라, 아무말도 못하고 그렇게 끌어안고 한 동안 있었다는 것이다.

갑자기 박부장은 당황한 듯 품에 있던 차대리를 밀쳤고, 차대리는 넘어지며 벽에 머리를 찧었다는 것이다. 아프고 챙피해서 얼굴도 못들고 엉엉 울어버린 것이다. 놀란 박부장은 미안하다고 미안하다고 연신 말을 하다 안되겠는지, 차대리를 놔둔 채 부장실에서 도망쳐 버렸다는 것이다. 임태성 대리가 들어와 울고 있는 차대리를 병원으로 데려가려 했으나, 차대리는 한사코 만류했고, 결국 아픈 머리만 만지며 집에서 혼자서 라면을 먹게 됐다는 것이 이야기의 전모다.

잠시 후, 차대리는 정신이 돌아온 듯 흥분한 자신을 가다듬으며, 나에게 다가와 나지막이 귀에 속삭였다.
“도현아. 나 가까이 가도 돼?”
“네?” 난 정말 그냥 묻는 말이었다. 그러나 차대리는 허락의 말로 이해하고 정말 가까이 다가왔다. 그것도 완전 밀착형으로, 이건 농구선수들이 슛을 막기 위해 서로 착달라붙어서 몸을 비비는 모습이랄까. 아니 홍대 클럽에서 부비부비를 하는 모습이다. 그러다 몸의 균형을 잃은 듯이 내 한쪽 무릎에 살짝 걸터앉았는데 난 얼어붙고 말았다. 어휴 정말 아무 생각이 나지 않는다. 20대로 보이는 30대 중반의 매력적인 여자가 이렇게 자유로운 몸짓으로 내 무릎을 이용하는 지금, 난 그냥 땀만 나고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눈 앞에는 차대리의 모습만이 왔다 갔다 했다. 세상이 아름답게 변하고 있었다.
그리고 차대리는 내 귀에 대고 다시 이렇게 말했다.
“도현아. 우리 오늘 회사 끝나고 홍대 쪽에 멋진 카페 알고 있는데 거기나 갈까?”
귀에 달콤함이 느껴진다. 차대리가 내 귀에 입바람을 불어 넣고 있었다.

내 머릿속에는 차대리와 민정에 모습이 오버랩되며, 영혼은 정신없이 길을 잃고 돌아다닌다.
민정이와 남산에서 새해 동틀때 끌어안고 키스하던 일, 학교 통로에서 부딧치며 처음으로 눈빛을 교환하던 일, 속초 바닷가에서 미래를 약속하며 커플링을 끼워주던 행복했던 기억들, 그 기억의 유리창에 차대리가 검은색 드레스를 입고 머릿결을 만지며 나에게 다가온다. 그리고 손에 있던 조그만 돌을 유리창에 던지고 ‘쨍그렁’ 소리와 함께 깨어지려는 찰나. 내 손에 있는 커플링이 보였다. 힘을 내어 손에 있는 커플링을 보여 주며, 내 무릎에 앉아 있는 차대리에게 이렇게 말했다.
“저... 저 애인이랑 내년에 결혼하려고 준비 중인데요.”

앗! 내게 이런 용기가 어디서 났는지 모르겠다. 아니 살면서 가장 필요없는 말을 한 것 같다.
‘민정아 나한테 고마워해라. 내가 모든 유혹을 뿌리치고 널 택한 거야. 응!’
차대리는 실망한 듯 내 무릎에 앉아 투정 부리듯 말을 한다.
“참 요즘 어린것들은 빨라요 빨라. 결혼 빨리해서 뭘 해. 결혼은 인생의 무덤이야 무덤. 남자가 즐길 땐 즐길 줄도 알아야지.”
손가락에 반짝이는 커플링. 네가 나를 지켰다.
지금 손가락에 끼어 있는 14K 커플링은 속초에서 민정이와 첫날밤을 보내고, 주변에 있는 금은방을 뒤지고 뒤져서 겨우 구했다. 사실 디자인도 단순하고 싸보이지만 우린 그 자체에 만족했다. 그래도 가슴한켠에는 너무 싼걸 준게 아닌가하는 미안함이 남아있다. 이제는 취직도 했으니 멋진 반지를 사서 프러포즈를 해야지하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이런 혼돈스러운 상황을 어떻게 정리해야 하나 차대리를 무릎에 앉혀 놓은 채 고민에 빠져있을 때, 갑자기 임대리가 사무실 문을 벌컥 열었다.
“어∼어∼어!” 이 상황을 본 임대리는 놀란 표정으로 입을 벌렸고, 순간 당황한 듯 재빨리 얼굴을 돌렸다. 잠시 정적이 흐르는 동안 우린 서로 아무말도 못하고 있었다. 갑자기 뭔가 생각난 듯, 임대리가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내 통화를 시작했다.(마구 마구 핸드폰 화면을 눌렀는데 정말 통화버튼을 누른건지는 지금도 모르겠다.)

“어 그래. 물건 언제 납품할 거야! 어. 어. 요즘 경기도 안 좋은데 이렇게 납기일 늦추다가 정리당한다니까. 아! 여기가 왜 이렇게 덥지.”
임대리는 땀이 이마에 송글송글 맺혀있었고 셔츠로 연신 땀을 흠치며, 눈으로는 궁금한 듯 나와 차대리의 모습을 곁눈질하듯 본다. 임대리는 방금 들어온 다용도실을 다시 나가야 된다고 생각했는지 눈은 우리를 보며 문을 당겼다. 순간 손에서 손잡이가 미끄러지며 문이 열리지 않았고, 문이 열린 것으로 착각한 임대리는 출입구를 나가려다 얼굴이 문에 세게 부딪쳤다.

‘쿵...억!’ 부딪친 코와 이마가 상당히 아플 듯도 했지만, 아픈 내색없이 후다닥 바닥에 떨어진 핸드폰을 주워들고, 당황한 듯 다시 한번 문을 열어 다용도실을 빠져나가는 데 성공했다. 나 또한 이 순간을 어떻게 정리해야 하나 하는 생각 때문에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이 상황을 설명해야 한다. 그래 사실대로 말하자 오해라고 이 모든 건 그냥 장난이라고.’
“임대리님!”
임대리님을 따라가려 재빨리 자리에서 일어났다. 순간,
“악!”
내 무릎에 있던 차대리는 외마디 비명과 함께 몸의 균형을 잃고 바닥에 대자로 자빠졌다. 나는 놀라서 임대리를 쫓아가지도 차대리를 도와주지도 못하는 엉거주춤한 자세로 있어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