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1년 7월부터 전쟁종료시까지 전투와 휴전을 반복했으며, 그 2년동안 중조 쌍방은 정전에 관한 입장차이를 노정
5차 전역이후 중국은 전쟁지속이 어렵다고 봄. 1951년 5월 하순 마오쩌뚱은 중공중앙회의를 개최하여 ‘협상과 전투를 병행하면서 회담 해결을 위해 노력한다는 방침을 채택(408, 주142)
김일성은 전쟁의 장기화 방침에 반대하면서 중조연합군이 6월말부터 7월 중순사이에 총공격을 다시 한번 전개해야 한다는 입장
마오쩌뚱은 6월 3일 김일성은 베이징으로 초청 협상, 결과 김일성는 6-7월 공격을 하지 않는 대신 좀더 준비를 한 후 8월 경에 한차례 반격을 요구(408, 주 143, 김일성이 펑더화이에게 보낸 전보, 1951년 5월 30일, 마오쩌뚱이 펑더화이에게 보낸 전보, 1951년 6월 11일)
마오쩌뚱은 스탈린에게 김일성의 설득을 요청, 6월 10일 김일성과 가오강은 소련의 항공기를 타고 모스크바로 가 스탈린과 의견을 교환한 후 정전협상의견을 수용하고 그 내용을 6월 13일 마오쩌뚱에게 보고하라는 지시를 수용함
귀국한 김일성은 6월 23일 유엔주재 소련대표 말리크가 정전회담을 촉구하는 발언을 한 것은 ‘중국이 정전을 달성하기 위한 가장 명확한 표시라고 판단하고, 동시에 말리크가 성명을 발표한 후 수일동안 조선의 언론계와 기타 선전기관들이 그의 발언에 상세한 해석이나 평론을 전혀 내놓지 않은 것 때문에 기분이 매우 울적’
(션즈화가 써 놓은 당시 김일성의 기분의 의미를 무슨 뜻으로 이해해야 할지 파악하기 곤란)(409)
조선지도자들은 중국대표단(책임자 리커농)이 미국인들에게 지나치게 관대하게 양보했다고 판단했으며, 동시에 중국인들이 담판과정에서 조선대표단의 의견을 제때 충분하게 수용하지 않은 점에 대해서도 불만
특히 7월 27일 마오쩌뚱이 김ㅇ릴성에게 “만약 미국이 현재의 전선을 분계점으로 할 것을 고수하면, 중국은 미국이 양보한 것으로 판단한다”고 통지
김일성은 이에 대해 극도의 불만을 나타냄 “이런 양보는 조선에게 심각한 정치적 타격을 주기 때문에 불가능하다”고 답을 보냈으며, 박헌영에게 “나는 중국의 지원없이 계속 전쟁을 하더라도, 이런 양보는 하고 싶지 않다”고 말함(409)
라주바예프는 “최근 몇개월 동안 조선인들의 중국인들에 대한 태도가 명백하게 냉담해졌으며, 조선인들은 좀더 단호하게 소련의 방침에 의지하게 되었다”는 점에 주목했다(409, 주146, 심지화편, 조선전쟁해밀문건, pp.1022-10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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