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은 전쟁포로를 억류해야 한다는 생각을 하지 않았다. 1950년 11월 17일 펑더화이는 군사위원회에 전보를 보내 전투가 시작되기 전에 100명의 전쟁포를 석방해 적의 군심을 동요시키자고 주장
18일 마오쩌뚱은 “일부 전쟁포로를 석방시키는 것은 아주 정확하다. 이후 전쟁포로들을 수시로 일정 수를 석방하되, 상부의 허가를 요청할 필요도 없다”고 함(413, 주156, 팽덕회년보, p.449)
1951년 11월 중국과 북한은 다음과 같이 합의
남한 포로는 인민군에 인계하고, 지원군은 다른 국가의 포로만 관리하기로 함(413, 주157, 주은래군사활동기사, 하권, p.242)
중국 측이 관리했던 전쟁포로는 매우 제한적이었으며, 담판에서 별로 얻을 것이 없었기 때문에, 중국이 ‘모든 전쟁포로의 송환’을 주장한 이유로 작용
조선측은 전쟁후 경제건설과정에서 노동력의 필요성에 대한 고려로, 암암리에 다수의 전쟁포로를 억류함
소련대사 수즈다레프는 다음과 같이 보고함
“조선동지는 다수의 전쟁포로를 억류하여 그들을 각종 힘들고 번잡한 노동에 종사시키는 것이 효과적이라과 생각하면서, 고향으로 송환을 희망하는 그들의 요구를 전혀 고려하지 않고 있다….그들은 이승만 군대의 전쟁포로 13,094 명을 억류해, 그 중 6,430 명을 인민군에 복무시키고 나머지는 내무부와 철도부에 배속해 노역을 시켰다. 그 외에도 전쟁 초기 남한에서 강제로 인민군에 입대시킨 42,262명을 억류시켰는데, 조선 동지들은 이들을 전쟁포로가 아니라고 판단하고 있다.”(414, 주 158, Волохова А, Переговоры о перемеирии в Корее, 1951-1953гг., Проблемы дальнего востока, No.2, 2000, cc.106-108)
북한의 입장에서는 중국처럼 모든 포로의 송환을 주장하기 어려웠다.
7월 15일 마오쩌뚱은 스탈린에게 전보를 보내 “미국 측이 제출한 방안은 쌍방의 비율이 서로 너무 차이가 나는데, 이는 적들이 이것을 이용해 중국과 조선 인민의 단결을 이간질하려는 음모입니다. 적들의 압력에 굴복한다면, 우리에게 매우 불리해 질 것입니다. 적들의 압력에 굴복한다면, 우리에게 매우 불리해질 것입니다. 이 문제는 정치적인 문제이며, 중국과 조선뿐 아니라 혁명진영 전체에도 영향을 미치기 때문에 회담이 결렬되더라도 절대 양보해서는 안됩니다”라고 했으며 스탈린은 마오쩌뚱의 입장에 동의한다고 답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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