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읽수다 통권 41권. 작년에 노벨문학상을 탄 가즈오 이시구로의 작품을 ㅡ 정확히는 《남아있는 나날》을 다루기로 했었는데, 엉뚱하게도 《나를 보내지 마》를 읽었습니다.
어쩐지 《남아있는 나날》이 아직 장바구니에 '남아있'더군요.
읽은 책이 서로 달라 함께 작품을 논할 수 없으니 치맥을 곁들이며 간단하게 소감을 나누기로 하였습니다.
가즈오 이시구로의 두 대표작 중 어느 작품이 더 재밌는지를 겨룬 셈이네요.
독서의 취향 공유, 책읽수다 시즌2. 통권 41번째 도서
나를 보내지 마, 가즈오 이시구로, 민음사
시공간적 배경은 1990년대 후반 영국.
1부
11년 이상 간병사 일을 해온 서른한 살 캐시 H.가 헤일셤에서의 기억을 떠올리면서 작품은 시작합니다. 주로 토미, 루스와 어울렸던 13~16세까지의 에피소드를 들려줍니다.
외부와 단절된 고립된 기숙학교에서 커가는 학생들, 학생들의 창작물을 외부 '화랑'으로 가져가버리는 '마담', 그리고 사실을 말하는 한 선생님과 들었으되 듣지 못하는 미래의 기증자들.
"그래. 넌 고든에게 최고의 기회를 갖기 위해 미국에 가야겠다고 말하고 있었지." 루시 선생님이 말했다.
피터 J.는 다시 어깨를 으쓱해 보이고는 조용히 중얼거렸다. "그렇습니다, 선생님."
하지만 루시 선생님의 눈길은 이제 우리 다수를 향해 있었다. "나쁜 뜻에서 그런 말을 한 게 아니라는 건 나도 안다. 하지만 이런 얘기가 너무 많은 것 같다. 이런 얘기가 줄곧 들려오고 그런 얘기를 계속하는 게 허용되고 있는데, 그건 옳지 않다." 홈통에서 더 많은 빗물이 쏟아져 선생님의 어깨에 떨어졌지만, 선생님은 의식하지 못하는 것 같았다. "다른 누군가가 너희한테 얘기해 주지 않는다면, 내가 말해 주마. 전에 말한 것처럼 문제는 너희가 들었으되 듣지 못했다는 거야. 감히 말하건대 사태가 이런 식으로 흘러가는 데 무척 만족하는 이들도 있지. 하지만 난 그렇지 않아. 너희가 앞으로 삶을 제대로 살아 내려면, 당연히 필요한 사항을 알고 있어야 해. 너희 중 아무도 미국에 갈 수 없고, 너희 중 아무도 영화배우가 될 수 없다. 또 일전에 누군가가 슈퍼마켓에서 일하겠다고 얘기하는 걸 들었는데, 너희 중 아무도 그럴 수 없어. 너희 삶은 이미 정해져 있단다. 성인이 되면, 심지어는 중년이 되기 전에 장기 기증을 시작하게 된다. 그거야말로 너희 각자가 태어난 이유지."
소재만으로도 충분히 긴장감이 도는데 작가의 문체로 인해 시종 기묘한 분위기를 풍깁니다.
2부
아이들은 자라 코티지로 이동합니다. 그리고 그 곳에서, 선임들이 노퍼크에서 루스의 '근원자'를 보았다는 소식을 접하지요. 그리고 그 실체를 직접 확인하고자 떠나는 무리.
한편 토미는 화랑과 기증 집행 연기에 대한 가설을 들려줍니다. '들었으되 듣지 못하는 문제' 마냥 사실을 직면할 때의 그 어떤 두려움과 불안감이 희망찬 삶을 억누르는 은근한 대치 상태.
"로이 J.가 어째서 마담이 우리 작품을 가져가느냐고 물었을 때, 에밀리 선생님이 뭐라고 대답했는지 기억해?"
"내 기억으로는, 선생님은 그건 일종의 특권이라고 했어. 그러니까 자부심을 가져야 한다고..."
"그게 전부가 아니었어." 토미의 목소리는 이제 거의 속삭이듯 낮아졌다. "선생님이 그때 로이에게 한 말, 그런 말을 할 생각이 아니었겠지만, 그러니까 무심코 흘린 말이 무엇이었는지 혹시 기억나, 캐시? 선생님은 로이한테 그림이나 시 같은 건 '한 인간의 내면을 드러낸다'고 했어. '영혼을 드러낸다'고 말이야."
토미와 루스는 사랑하는 사이가 되고, 캐시는 그 둘 사이에 있습니다. 이 지점에서 무라카미 하루키의 '상실의 시대'가 약간 오버랩되기도 했습니다. 영국 작가라고는 해도 일본에서 태어났으니 아마 공통된 정서 같은 게 투영된 거 아닐까 라고도 추측해보았습니다.
3부
루스가 죽고 캐시는 토미의 간병을 맡고, 그들의 관계는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게 됩다.
3부에서는 비로소 앞선 사건들의 이면이 설명되지요.
"어째서 그런 걸 증명하셔야 했던거죠?"
반전이 있어 말을 아끼겠습니다.
"토미, 우리가 알아낸 이 모든 걸 루스가 모르고 죽은 게 다행이라고 생각해?"
뉘앙스만으로 긴장감을 일으키고 미묘한 감정을 섬세하게 잡아낸 작품입니다. 복제인간을 다룬 SF소설이지만 사람냄새가 물씬 풍기고, 애잔한 감동을 안기는 성장소설이에요. 너무 깊이 알면 상처 받을까봐 두려워 진실을 부러 외면해온 사람에게 권합니다.
좋았던 기억이 있는 책이였는데, 몇개의 단어들과 느낌만 기억납니다. 다시 읽어보겠습니다.
맞아요. 분명 읽었는데 그저 잔상만 남는 경우가 있어요. 루시 선생님의 말을 빌려쓰자면 '읽었으되 읽지 못했다'네요.^^ 기억하기 위해 기록합니다.
독서 팟캐스트에서 소개되어 재미있게 ‘들’은 기억이 나네요. 흥미로운 이야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