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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5월16일(수) 마약중독자의 일기 (2)
한겨레에 누를 끼친 것은 맞다. 하지만 분명 팀장은 내게 ‘너도 살고 회사도 살 수 있는 방법을 찾아보자’고 했다. 난 그 말을 믿고 뭐든 회사에 가감없이 그동안 겪었던 이야기를 전하고, 심지어 타사 기자들에게는 거짓말을 자처해가며 회사를 보호했다. 그런데 이제 보니 한겨레는 나를 보호할 생각은 조금도 안하고 있었던 것 같다. 그렇지 않고서야 지금 어떻게 이런 행동을 할 수 있지?
문득 며칠전 팀장과의 전화통화에서 “너 이번달이 창간 30주년 기념일인건 알지?”라고 했던 말이 떠올랐다. 아. 이제야 내 둔한 뇌 속으로 날카로운 칼이 하나 와서 박히는 것 같다. 이게 그런 뜻이었던건가. 창간 30주년 기념일에 방해된다면 법으로 보호받아야할 노사 협약이고, 인권이고 나발이고 모두 뒷전이라는 걸 내게 알렸던 신호였던건가. 난 그것도 모르고 ‘뭐든 협력하겠습니다’ 하고 팀장에게 말했단 말인가. 바보같이.
내가 그 많은 마약중에 하필이면 필로폰을 했었다는 그 사실이 나도 충격이지만, 이런 때에 나를 대하는 회사의 태도는 나를 더욱 까무라치게 만든다. 마약을 치사량만큼 주입받는 느낌이다. 심장이 타들어가는 것 같다.
그런데 심장을 겨우 부여잡고 쓰러져 정신을 차릴 새도 없이 회사 인사팀에서 전화가 왔다.
“오늘 오후에 징계위원회를 열려고 합니다. 여기에 동의해주십시오.”
“뭐라구요? 전 동의 못하겠어요,”
“허재현씨 본인 동의가 없으면 오늘 당장 열수는 없습니다.”
그렇다. 노사 협약에 의해 회사는 당사자에게 고지한 뒤 일주일여의 시간을 두고 징계위원회를 열게 되어 있다. 본인의 방어권을 보장할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전화가 다시 걸려왔다.
“오늘 반드시 징계위원회를 열어야 한다고 합니다.”
“이보세요. 저도 제가 한 마약의 종류를 오늘 처음 알았어요. 저한테 필로폰을 준 사람을 찾아야 하고 소명할 자료를 찾고 준비를 해야하잖아요.”
“그냥 오늘 징계위원회에 출석해서 소명하실 수 있습니다.”
“증인을 세우고 저도 준비할 시간을 주셔야죠.”
“오늘은 정말 안되시겠습니까.”
“네, 안되겠습니다!!!”
나는 마지막에 버럭 소리를 지르고 말았다. 전화를 끊어버렸다. 회사는 끝내 오늘 당장 나를 해고하고 말겠다는 심사인가보다. 저들이 대체 내게 왜 이러는 걸까. 결국, 30주년 창간기념일 앞에 허재현을 전직 기자로 만들어야만 그나마 좀 비난을 피할 수 있다는 계산인걸까.
이 와중에 팀장은 내게 전화 한통 없다. 이젠 나를 버리는 건가. 아니, 처음부터 나를 한번이라도 진심으로 걱정해주긴 했던 걸까. 팀장도 괴롭겠지. 하지만 난 죽을 거 같다.
연락처를 찾아야 한다. 나의 마음을 불타는 재처럼 만들어버린 과거의 그 사람을. 내가 어떻게 마약을 하게 된 것인지 그가 회사에 좀 설명해줄 수 있지 않을까. 중독자인 사람을 치료해보겠다고 나섰다가 벌어진 불행이다. 정상참작 사유를 만들어야 한다. 내가 회사를 자진해서 떠나더라도 이런 방식이 되어서는 안된다. 그런데 연락처고 뭐고 기록이 아무 것도 없다. 내가 자꾸 같은 실수를 반복하게 될 것 같아 내 스스로 그와 접촉할 수 있는 모든 수단을 없애버린지 오래다. 대체 이 일을 어떡해야 할까.
정신을 못차리고 있는 사이 모르는 번호로부터 문자를 받았다.
“안녕하세요. 저는 연구모임 POP에서 활동하는 나OO입니다. 저에게 기자님 번호가 있었네요. 아마 몇년전 취재에 응했던 거 같아요. 한겨레신문사 사과문을 보고 기자님께 너무 부당하게 상황이 돌아가는 게 아닌가 하는 마음에 연락드렸어요. 혹시라도 도움될 일이 필요하면 연락해주세요.”
설사 마약을 했다 하더라도 초범이고 범죄의 수준이 경미하다면 검찰이 기소유예 처분하는 경우도 많다. 나는 기소유예 처분받을 가능성도 있다. 만약 그렇게 된다면 일단 회사로부터 적정 수위의 징계를 받은 뒤 스스로 도의적 책임을 지고 회사를 떠나면 된다. 이렇게 다짜고짜 물의를 일으켰으니 내게 사표를 내라고 강요해서는 안된다.
내일 나OO님을 만나 상의해봐야겠다. 이런 전화를 받게 되다니 너무나 뜻밖이다. 마약 범죄자를 걱정해주는 사람들도 있구나. 하루하루가 지옥이지만 그래도 숨은 쉴 수 있구나.
※당부의 글.
안녕하세요. 허재현 기자입니다. 우리 사회는 그간 마약 문제에서만큼은 단 한번도 마약 사용자들의 이야기를 직접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이 연재글은 마약 사용자들이 어떤 일상을 살며, 어떤 고민들에 부닥치는지 우리 사회에 소개하고자 시작한 것입니다. 마약 사용을 미화하려는 의도가 아닌, 우리 사회에 바람직한 마약 정책이 무엇인지 함께 고민해보려는 의도입니다. 마약 사용자들과 우리 사회가 함께 건강한 회복의 길을 걸을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인지 고민해보려는 의도입니다. 이점 널리 혜량해주시어 읽어주시면 고맙겠습니다. 감사합니다.
▶관련글 / 허재현 기자의 마약일기를 시작하며
https://steemit.com/drug/@repoactivist/4vbegb