빈 페이지만큼 사람을 미치게 만드는 게 없다. 나는 글을 쓰기 이전에 그림을 그렸는데 그때도 마찬가지였다. 텅 빈 하얀 종이 앞에선 늘 인생 최대의 위기가 찾아온다. 다행히 제목을 짓겠다는 핑계로 첫 문장을 뒤로 미룬다. 그렇게 해야 미뤘던 끼니를 간신히 챙길 수 있다.
커피 한 잔의 여유를 즐기며 다른 이들의 글을 읽는다. 욕이 나올 정도로 잘 쓴 글 앞에서 주눅이 든다. 카페인이 돌며 눈은 점점 맑아지는데 저들처럼 멋지게 쓸 문장이, 드라마틱한 구성이 생각나지 않는다. 하라면 할 수 있을 것 같은데 지금은 아니다. 이런 힘든 일은 무의식에게 맡기는 게 상책이다. 그렇게 다른 일을 하며 애써 미루다가, 더는 미룰 수 없을 때가 오면 컴퓨터 앞에 앉는다. 이제 물아일체의 경지로 술술 쓰기만 하면 된다. 될까?
이제는 머릿속까지 하얘진다. 무슨 얘기를 쓰려 했는지조차 잘 생각이 안 난다. 이번에는 다른 의미에서 욕이 나온다.
나와 같은 문제를 겪는 분들에게 내가 제시할 수 있는 세 가지 해결책이 있다. 그리고 이 세 가지에 앞서 해 봄직한 아주 간단한 방법을 먼저 소개한다.
수치심을 버린다
당신은 남들보다 높은 수치심을 가진 게 분명하다. 이곳은 열린 공간이다. 글짓기 대회를 하는 곳이 아니다. 좀 못 쓰면 어때? 진심은 다 통하기 마련이다. 어때유? 간단하쥬?
그런데 이 방법으로 해결이 안 될 때가 있다. 수치심 하나로 해결하기에는 다소 복잡한 갈등이 내면에서 소용돌이치는 경우다. 다른 곳에서 하던 대로 편하게 글 쓰고 소통이나 하고 싶은데 '보상'이라는 것 앞에서 양심의 가책을 느끼고, 디클라인을 걸면 되는데 그렇다고 모든 글마다 보상을 마다하면 굳이 스팀잇을 할 이유가 없고, 그래서 남들처럼 멋드러진 글이나 공감 백배의 글로 당당하게 보상 받고 싶고, 그렇게 글로 인정 받고 돈을 벌고픈 내적 욕구까지 충족하고 싶은데 고수들 글 앞에서 자꾸만 작아진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글쓰기 연습을 한다
매우 당연하게도 무언가를 잘 하려면 꾸준한 연습으로 기량을 연마하는 수밖에 없다. (아니면 접신을 하는 방법도 있다) 그와 관련한 책은 서점에 차고 넘친다. 이곳 스팀잇에도 좋은 글이 많다. 참고해서 많이 쓰다 보면 실력이 안 늘 수가 없다. 문제는 처음에 충만했던 의욕이 며칠 못 간다는 데 있을 뿐이다. (빗골에 물렸는가? 하늘이 주신 기회다. 당장 크립토왓치를 끄고 글쓰기에 매진하라) 정 못하겠다면 일기라도 꾸준히 써라.
비고: 온라인에서 먹히는 글쓰기는 따로 있다. 저는 포기했슈...
많이 읽는다
사실 글쓰기 연습에 앞서 이것부터 해야 한다. 좋은 글만한 스승이 없다. 여러분이 드라마를 볼 때 여주가 다음에 칠 대사, 남주의 리액션 따위를 소름끼치게 정확하게 맞춘 적 있지 않은가? 많을 것이다. 그게 여러분이 드라마 대본을 많이 써 봐서인가 드라마를 많이 본 덕분인가? 아이들은 쓰기에 앞서 말하기와 읽기부터 배운다는 것을 다시 생각해 보자. 게다가 읽기는 쓰기보다 훨씬 쉽다.
이제 여러분은 긴 글도 짧은 글도 자유자재로 쓸 수 있게 됐다!
어... 그런데 다시 맨 앞의 문제로 돌아간다. 빈 페이지가 주는 압박감이 여전히 어마무시하다. 최소한 내가 쓰고자 하는 글을 일필휘지로 완성할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첫 문장을 떼는 것조차 힘들다. 왜 이럴까?
받아들인다
포기하면 편해...가 아니라 이 두려움이 지극히 당연한 일임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힝 속았지
나는 어렸을 때 어른이란 두려움을 느끼지 않는 존재라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막상 어른이 되었는데도 두려움은 나를 떠나지 않았다. 오히려 더 커졌다면 모를까. 자신의 나약함에 실망할 수밖에 없었다. 두려움을 없애는 것만이 그 실망감을 떨치는 유일한 길처럼 보였다. 그건 불가능한 일이었고, 내 실망감은 영원히 이어질 것만 같았다.
물론 다른 길이 있었다. 내 안의 두려움을 인정하고 받아들였던 것이다. 그렇게 할 수 있었던 건 다른 이들도 나와 같다는 걸 깨달은 덕분이다. 글쓰기도 마찬가지다.
내게 철학하는 법을 가르쳐 주신 은사님 댁에 갔을 때의 일이다. 여러 곳에 기고하고 논문을 쓰고 저서를 집필하느라 은퇴 후에 더 바빠진 교수님의 서재를 구경하던 중 화면에 띄워진 빈 페이지가 눈에 들어왔다. 그 순간 무심결에 묻고 말았다.
"선생님도 글을 쓰는 데 어려움을 느끼시나요?"
"그렇고말고!"
특히 첫 줄을 쓰는 게 힘들고 두렵다는 고백이 더해졌을 때의 안도감이란! 후에 역사에 남을 대작가들도 매번 빈 페이지에 공포를 느끼고 첫 줄을 쓰는 고통을 겪었다는 걸 알고 나서 내 안도감은 굳건해졌다. 요컨대 '하물며 나 같은 미생은 오죽할까'라는 논리로.
스팀잇은 따뜻한 공간이다. 여러분이 쓰고자 마음만 먹는다면 격려와 응원을 아끼지 않을 분들이 이곳에 다 모였다. 부디 꾸준히만 쓰길 바란다.
문학적 글쓰기를 위한 kr-pen 태그를 활성화하고 있습니다. 소설부터 인문, 르포까지 본격적인 글쓰기에 해당한다면 kr-pen 태그를 달아주세요. 여건이 되는 대로 응원하러 가겠습니다.
저 역시 응원합니다!
문학적 글쓰기.. ㅎㅎㅎ 정말 오랜 시간동안 고민하는 분야입니다. 기존의 블로그에서도 하지 못했던 것을 여기에 와서도 여전히 고민하고 있고요. 만나뵙게 되어서 반갑습니다.
응원 감사합니다! 고민하며 쓰는 글은 상응하는 가치를 만들어준다 생각합니다. plop님 블로그도 찬찬히 둘러볼게요. 대략 8시간 후에 다시 뵙겠습니다😪
글을 쓰고는 있지만 뒤가 찝찝함도 없지는 않았는데
해당 포스트의 글을 읽고 참고해야 겠다고 생각했습니다.
특히나 글을 써본적 없고 타인에게 자신의 생각을 공개적으로
드러내 본적이 없었던 저에게는 말이죠
(물론 지금에 와서는 개이치 않지만 말이죠(웃음))
잘 보고 갑니다.
P.S
문학 관련 활성화 응원합니다.
밑천이 드러나는 게 아닌지- 공감은커녕 부정만 당하는 게 아닌지- 괜히 흑역사를 만드는 게 아닌지- 공개된다는 일에는 늘 두려움이 따라오죠. 스팀잇에는 넓은 이해심과 포용력으로 무장한 분들이 상시대기 중이라 얼마나 다행인지 모릅니다😅 응원 감사합니다!
처음 뵙습니다 :)
글쓰기에 관심이 많아 자주 뵙게 될 것 같습니다.
반갑습니다. 자주 뵙죠! :)
늘 글쓰기가 두려운 1인입니다. 저도 꾸준히 노력하면 언젠가는 잘 써지겠죠?! 응원하겠습니다!!^^
어느 분야든 고민을 수반한 노력에는 좋은 결과가 뒤따르는 것 같습니다. 응원 감사합니다!
멋진 글입니다. 똥글을 쓴다며 수치심에 쥐구멍을 찾던 매일매일이었습니다. 저만 그런것은 아니라니 다행이군요. 저도 언젠가 이런 경탄할만한 글을 쓰고 싶네요~^^
저는 빠른 길을 택했습니다. 수치심을 줄인 거죠. 이 정도 칭찬은 뻔뻔하게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데헷
이렇게 흑역사를 늘려 갑니다😇하루에 글쓰기에 할애하는 시간 중 절반 이상이 빈 페이지를 쳐다보고 있는 시간이지요. 저는 그래서 메모를 자주 합니다. 일상 중에 떠오르는 주제, 중심문장 등을 메모해놓고 글을 시작하면 공백 앞에서 머리를 쥐어뜯는 시간이 확실히 줄어드는 것 같습니다.
메모에서 키워나가는 글쓰기, 참 좋죠. 글 잘 쓰시는 분 중 메모를 소홀히하는 분은 거의 못 본 것 같습니다. 한편으로 저는 마감이 걸린 글을 쓸 땐 인터넷이 안 되는 환경을 강제로 만들곤 했습니다. 의지가 박약해서인지 인터넷이 되면 너무 쉽게 다른 세상으로 도피하는 바람에... 그게 카페를 찾던 이유 중 하나였지요.
오늘은 위트를 조금 가미하셨네요.ㅎㅎㅎ많이 배우고 갑니다.
아 참, 저 지난 번 본 드라마에서 다음 대사 맞춰보니 소름이...
저만 알고 있으려 했지만 수치심을 버리기 위해 써봅니다.
벌거벗고 광화문 네거리에서 뛰어다니는 심정으로 넣어봤습니다😂 수치심을 포기하면 세상 편해집니다
좋은 글 감사합니다! 저는 여행에 관심이 많은 여행작가 중 한명입니다. 업보트 및 할로우 하고 갑니다. 여행에 관심많으시면 놀러오세요~!
감사합니다! 저도 팔로우 했습니다. 자주 들를게요 :)
글쓰기는 참 어렵죠ㅎㅎ 저도 글하나 올리려면 시간이 무지하게 걸리네요~
저도 이 짧은 글 쓴다고 밤 시간을 다 도둑 맞았네요😂 들러주셔서 감사합니다.
아... 이런 글을 보고 싶었습니다. 친절하면서도 고민이 묻어나는 글, 글쓰기에 왕도가 없다는 진리를 다시 한 번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문단을 시작할 때 한 칸을 들여쓰시는 디테일에서, '아, 이 분은 뻣속까지 글쓰는 사람이구나' 하게 되네요. 오늘도 좋은 글 감사합니다.
철수2님처럼 좋게 봐 주시는 분들이 계셔서 올릴 수 있는 글이죠. 진지해 보이려고 막 들여쓰기 넣고...😅
글을 쓴다는게 정말 에너지도 많이 소진되고 힘든거같습니다ㅎ
매일 쉽게 하는 말인데도 그걸 글자로 옮기는 건 쉽지 않죠. 그래도 컴퓨터로 쓸 수 있는 시대라 얼마나 다행인지 모릅니다😅
'받아들인다'라는 말에 크게 공감합니다:) 정말 좋은글 잘보았습니다!
공감해 주시니 글 쓴 보람을 느낍니다. 감사합니다!
리스팀 감사합니다. 덕분에 왠지모를 조금의 뿌듯함이 생겼습니다. 재미있는 글 잘 읽고 갑니다. 많은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저도 열심히 쓰겠습니다.
좋은 글 올려주셔서 감사한 걸요. 제가 고래였으면 보팅 팍팍 찍어드렸을 텐데... 영향력이 없어서 죄송할 따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