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손석희 사장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손석희가 언론 대기업 사장이어서 그런 것만은 아니다. 손석희는 jtbc "뉴스룸"의 '앵커브리핑'이라는 코너를 진행하면서 너무 많은 '위조사실(fake fact)'을 생산했다. 특히 '앵커브리핑'은 평소 내가 정말 싫어하는 코너인데, 촛불혁명 과정에서는 어쩔 수 없이 지켜봤지만(이 당시 공이 있음은 인정하지만, 그 수혜도 충분히 누렸으니, 이제는 쎔쎔이다), MBC가 정상화된 그날부터 그 코너는 물론 '뉴스룸'도 볼 일이 없게 됐다.
좌표: [앵커브리핑] '아날로그…낭만에 대하여'
알파고와 이세돌의 바둑 대결이 벌어지던 지난 2016년 3월 9일 자 '앵커브리핑'을 보자. 3분 10초 짜리이니 시간이 아깝진 않다. 사실 이번 편은 시청자 호응이 많았기도 했다. 소감이 어떠신가?
이번 편은 손석희 사장 특유의 '브리핑' 방식이 농축되어 있어서 더욱 주목할 만하다. 뭔가 문학적인 수사(修辭)가 잔뜩 묻어 있는데, 정작 중요한 대목에서는 사실 자체가 틀린, 뭐 그런 식. 손석희는 마지막 남은 인간다움으로서 '낭만'을 들고 있는데, 그 설명이 정말 가관이다. '낭만'이라는 낱말을 구성하는 글자 하나하나를 손석희는 이렇게 풀고 있다. "浪 물결 랑, 漫 흩어질 만. 미묘하게 일렁이는 마음의 파동. 언어로는 쉬이 표현하기 어려운 사람만이 갖는 고유한 감정, 바로 낭만입니다." 나는 당일 생방송으로 이 브리핑을 지켜보고 있었는데, 순식간에 욕이 튀어나왔다. "저런~ 무식한!"
사실 '낭만'이라는 말은 서양어 romanticism의 번역에서 유래했다. 일본의 소설가 나쓰메 소세키는 이 말의 어근 부분인 roman(로만, 로망)을 ろうまん(네이버 사전에서 긁어 붙여 발음을 들어보셈)이라고 음차(音借)했으며, 그에 해당하는 한자어가 浪漫일 뿐이었던 것. (맨날 '로망'이란 말 입에 달고 살면서도, 이 사실 모르는 사람 많다!) 즉, 발음을 흉내내서 표기한 것일 뿐이며, 낱낱의 한자는 아무 의미도 담고 있지 않다.
'낭만'은 서양 개념이 한자 문화권에 번역되는 과정에서 일어난 많은 '음차'(발음 빌려쓰기)의 한 사례이다. function의 음차 '함수(函數)', geometry의 음차 '기하(幾何)' 등 많은 사례가 있다. 이걸 '函數'니까 '수를 담는 상자'라고 풀이하거나, '幾何'니까 ''얼마'를 탐구하는 학문'이라고 풀이하면 얼마나 우스꽝스러울까. 그런데 손석희 사장이 하고 있는 일이 바로 그 일이다. (물론 작가를 탓해야 맞겠지만, 손 사장이 저 작가를 고용했고, 또 오래 살피건대 그게 손 사장의 취향이라는 점에서, 궁극적 책임은 손 사장에게 있다.)
학술 용어는 대부분 서양어의 번역어라서 원어와 어원을 밝히는 게 더 유익해요. 동양의 학술어는 대부분 한 글자였고(仁, 義, 誠, 知 등), 두 글자가 넘어가면 문장이 됩니다. 심지어는 자연(自然)이라는 개념도 서양어 nature의 번역어예요. 노자의 『도덕경』에 ‘자연’이라는 말이 딱 한 번 등장하는데, 개념이 아니라 ‘스스로 그러하다’라는 뜻의 문장이에요. 따라서 번역어만 갖고 한자로 뜻풀이하면서 논쟁하는 건 무익한 말꼬리 잡기로 가기 십상입니다. 논의를 시작할 때 지금처럼 뜻을 분명하게 규정하고 공유하는 게 꼭 필요해요.
-- 『인공지능의 시대, 인간을 다시 묻다』(2017), 107쪽.
내가 이번 포스팅에서 강조하려는 점은 딱 하나이다. 서양에서 유래한 개념의 상당수는 서양에서의 용법에 맞게 풀이해야, 그 다음 진도를 나갈 수 있다는 것. 번역어를 아무리 뜯어봐도 본디 의미가 나오지는 않는다는 것. 이 일은 부디 철학뿐 아니라 서양에서 유입된 '학문 전반'에 모두 해당한다. 그런데 손석희 사장뿐 아니라 많은 얼치기들이 이런 식으로 개념에 접근하는 경우가 많다. 나는 논의를 시작할 때 저런 식으로 이야기를 꺼내는 사람과는 말을 섞지 않는다.
어제 포스팅(철학에서 벌어지는 언어 또는 개념의 전쟁)에 이어 진도를 조금 더 뽑아봤습니다. 그럼 romanticism 즉 '낭만주의'는 무슨 뜻일까요? 이에 대해서는 나중에 설명드리도록 하겠습니다. '낭만주의'를 이해하려면 '(신)고전주의'에 대한 이해가 필요합니다.
이상 @armdown ('아름다운'으로 발음됩니다) 철학자였습니다. 어린이날 연휴 마지막 날 잘 보내세요.
낭만이 로맨스의 음차라는건 의무교육에서도 가르치는 내용인걸로 압니다. 낭만이 로맨스의 음차가 아니라고 가정하더라도, 한자를 뜯어 보는걸로 개념을 해석한다는건 여전히 우습죠.
마지막으로, '미묘하게 일렁이는 마음의 파동'이라는 해석이 옳다고 하더라도, 인간의 창조물이 인간을 넘어서는 순간에 미묘하게 일렁이는 마음의 파동이 없을건 또 뭡니까?
ㅎㅎ
역시 스팀잇의 철학자 다운 말씀이네요.
이번 사례는 하고 싶은 말을 하기 위해 개념을 맘대로 써먹고 싶은 심경이 드러난(
뽀롱난) 경우이겠지요.정말 좋은 정보 감사합니다. 무지해서 그냥 끄덕끄덕했습니다. 정말 문제가 많네요. 바른 정보로 알려주셔서 감사합니다.
낭만의 유래가 로맨틱시즘에서 유래하였다니. 새로운사실 알고갑니다.ㅎㅎ
감사합니다.
연휴 마지막 즐거운시간되세요~
블랙리스트 뉴스 다룰때 뒤에 "rist" 떡하니 써붙이고 방송하던 짤을 본 게 어제 같으니 뭐 특정 다수의 저런 방송 관련인들의 수준은 상상을 초월할지도요.
근데 저런 이들의 논리는 음만 따왔건 말건 동양권에서 이유가 있어서 특정 글자들을 썼고 그게 유의미하다는 것일겁니다.ㅋㅋ
어차피 할 말만 하겠다는 거니까요 ㅎㅎ
개발자들이 많이 사용하는 단어들 중 하나가 함수인데, 그게 음차로 만들어졌다는 건 뒤늦게 알게 되었네요. 또 하나 배우고 갑니다. 감사합니다.
어원을 따져 풀이해보지 않으면 정확한 뜻을 알기어렵군요. 저번 포스팅에서도 그런 부분을 설명하셨는데, 항상 강조하시는 것 같습니다. 배워갑니다.
낭만의 뿌리가 로맨티시즘이라니..... 역시 성을 잘 즐기고 사는게 인간 궁극의 행복일지도 (...) 감사합니다.
손석희는 시인이 되려나 봅니다 ㅋㅋ
낭만주의는 인간에 대한 깊은 탐구가 아닐까요
신의 속박에서 벗어나 인간 본연에 대한 탐구^^
멋진 낭만주의 포스팅 기대해 보겠습니다
저도 훅 넘어가겠네요. 영어든 한국어든 한자, 영영사전을 꼼꼼히 체크하고 공부해야겠군요. 무엇이든 너무 당연하게 생각하고 넘어가는 버릇이 있는 것 같네요.
저도 손석희를 좋아하지는 않습니다. 특히 언급하시 fake fact 부분에서는 몹시 부정이기더 하죠ㅎㅎ
그런데 궁금해서 질문 한가지 드리자면
한자 차음 같은 경우는 발음만이 아닌 뜻도 고려해서 차용하는 것 아닌가요? roman에 대한 중국인들의 뜻 풀이가浪漫이었던 것이 혹시 아닌지 궁금해지네요.
포스팅 잘 보았습니다!!
말씀드린 것처럼 일본 작가 소세키의 번역인데, 한글 식으로 하면 '로만'이나 '로망'이라고 소리를 옮겼을 테고, 거기에 浪漫과 같은 한자어가 개입될 여지가 없었을 겁니다만, 일본어는 사정이 달라서 한자가 따라붙은 거지요.
여기서 한자의 뜻이 일차적으로 중요한 건 아니라는 게 포인트입니다. function은 '수를 담는 상자'와 전혀 상관이 없는 것처럼요. 한글로 옮겼다면, '펑션'이라고 했을 상황이지요.
나중에 포스팅하겠지만 '낭만주의'는 저 한자어가 담고 있는 뜻을 아주 일부만 포함하고 있습니다.
네 친절한 댓글 감사합니다.
덕분에 식견을 많이 넓혀 가네요!
감사합니다!!
오호 처음 알았습니다 낭만ㆍ 자연까지 ㆍㆍ한 자이상 단어들은 의심의 눈초리로 ㅎ 배워갑니다 ㆍ
아름다운님 그래도 무식한사람하고도 좀 놀아주세요 ㅎㅎ
함수가 음차란걸 얘기해주면 애들이 다 놀라죠 ㅎㅎ
저런식의 접근은 진짜 무의미한것 같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개념을 정확히 접근하다보면 재미없고 어려워진다는게 단점이죠. 이걸 잘하면 진짜 고수~!!
그렇게 '팩트' 좋아하시는 분들이 날조는 밥 먹듯이 하는게 참 웃기죠.
Jtbc.... Fact check로 떴지만 fact가 부실한...
참 아쉬운 언론이네요
저는 JTBC 뉴스룸을 항상 챙겨보는편인데, 언제부터인지 '앵커브리핑'은 잘 안보게 되더라구요. 이유가 무엇일까 생각했더니 다른 뉴스들은 어찌되었든 JTBC가 이해한 Fact 기반의 사실이라면, '앵커브리핑'은 뭔가 생각을 강요하는 듯한 느낌을 받게 되면서부터. 손석희가 하는 말이라면 무조건 맞겠지, 정당한 것이겠지, 좋은 말이겠지라고 생각해도 무언가 불편한게 거부감이 들더라구요. 그런의미에서 저런 브리핑 방식이 조금은 불편합니다. 포스팅 잘 보고 갑니다.
geometry의 음차 기하에서 조금이라도 관련있는 한자를 사용하기 위한 노력이 있어 幾何에 이르렀다는 이야기를 들은적이 있는데, 낭설인가보네요~
요즈음 앵커브리핑을 보면, 가끔 오버할때가 있다는 생각이 들어 개인적으로 많이 아쉽습니다. 내용이 외형에 끌려가는 느낌...
음차할 때 최대한 뜻을 고려하려고 하는 건 당연하지요.
그렇게 고려된 뜻이 원 뜻과 별 상관이 없다는 게 함정.
원 뜻을 막바로 배우지 않으면 별 소용 없습니다.
강의나 설교 등에서 비슷한 사례를 많이 접해요. 배울만한 강의는 정말 희귀해요.
손석희 씨가 직업 윤리를 대놓고 무시한 케이스가 두 번인가 있었죠. 언론인들 사이에서 평이 좋을 수가 없을 것 같은데…
나아가 앵커 브리핑 같은 코너가 있어야 할 이유를 모르겠어요. 정보도 없고 감동도 없는 아마추어 배우 지망생의 연습 무대를 보는 기분
손석희 뉴스 안좋아 하는데 이런 방송이 있었네요 ㅋ
낭만을 설명하는 배경에 물결까지 해놔서
곧이 곧대로 믿기도 하겠어요~헉 ㅋㅋ
서울은 조선시대에도 쓰였다고 하고, 기하는 중국어 음차, 낭만은 일본어 음차, 자연은 번역, 많은 학술 용어가 일본인의 번역, 다들 일본어라고 하던 구두가 백제어 아니냐고 하고. 뿌리는 굉장히 복잡하고 알 수 없는 경우까지 많지요. 그런데 신문에서 미망인이라는 단어를 볼 때 신문기자는 남편이 죽었는데 따라 죽지 못한 여자라는 의미로 썼고 사회는 그러한 표현을 용인하고 있는 것이 아닌 이상, 할머님께서 쓰시는 욕봤다가 강간당했다는 말이 아닌 이상 애초에 뿌리를 따지는 것에 무슨 의미가 있나 싶습니다. 물론 그렇다 하더라도 적은 노력으로 읽는 누군가 받을 수도 있는 상처를 방지하기 위해서 미망인 같은 단어를 지양하고 있습니다.
또 한 번 배우고 갑니다~
근본적인 개념을 제대로 아는 건 참 어렵고, 부지런해야 하는 일인것 같아요. ㅎㅎ 저도 언론들의 진실 조작에 염증을 많이 느끼게 되더라고요.
어원의 중요성 다시 한번 깨닫고 갑니다.
음차한 단어들이 정말 많은 것 같습니다.
사실 비판없이 받아들이곤 했는데 아름다운님 말씀을 보고 반성하게 되네요. 낭만의 어원도 새롭게 알고 갑니다 :)
아름다운님 블로그에 오랜만에 놀러왔는데, 글을 올리시는 속도가 정말 대단하시군요 +_+ 저같이 게으른 스티미언에게는 따라잡기 힘드신 속도이십니다 ㅎㅎ
그나저나 한문은 뜻글자라고만 생각해서 이정도까지 음차된 단어들이 많은것은 처음 알았습니다!
무식이 죄는 아니라지만이런 상식을 넘어선 지식을 알려면 보다 자주 아름다운님 블로그에 들려야겠다고 결심하고 갑니다. 감사합니다 ^^저는 그냥 손석희씨가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뉴스룸을 봅니다. 맘에 들때도 있고 안 들때도 있지만, 어떤 이슈가 있을때 앞뒤 생각하지 않고 달려드는 그 패기가 젊은이를 능가하는것 같아 그 부분을 좋아합니다. 저 나이에 사장까지 올라서 그러기가 쉽지 않지요.
hermes-k님이 armdown님을 멘션하셨습니당. 아래 링크를 누르시면 연결되용~ ^^
hermes-k님의 [헤르메스의 작은생각] '기하'가 '모양'이라고요? - 서화숙 기자와의 가상대화
이상하게 몇몇 분야에 대해서는 시각이 편협해질때가있어서 요새는 거르는중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