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범한 속물, 헨델의 삶(5-마지막)

in #kr7 years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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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헨델의 데드마스크>

헨델은 욕망에 솔직한 정력적인 사람이다. 그는 1차 왕립 아카데미의 실패가 언제 있었냐는 듯 2차 왕립 아카데미의 성공을 위해 동분서주하며 창작열을 불태웠다.

헨델은 다시는 쿠초니와 보르도니 같은 인기스타 프리마돈나를 영입하지 않겠노라 다짐했다. 그는 스타성이 없어서 주변 사람을 괴롭히지 않을 가수, 발탁해주면 고마워할 줄 아는 프리마돈나를 골랐다. 팬덤 따위 다시 경험하기 싫었다.

헨델의 낙점을 받은 소프라노는 마리아 스트라다였다. 노래실력이 뛰어난데 스타성이 없으려면... 진실은 잔인하다. 그녀는 심하게 뚱뚱했고 얼굴도 추녀였다. 출중한 노래실력에 어울리는 무대에 한 번도 설 수 없던 마리아 스트라다는 헨델 덕에 런던에서 주연 자리를 꿰찼다.

마리아 스트라다는 헨델에 감격했고 감사했다. 그리고 헨델이 원하는대로 고분고분했다. 그러나 오페라는 노래가 다가 아니다. 그녀에 대한 평은 냉혹했다.

“노래는 좋지만 외모 때문에 몰입을 방해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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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리아 스트라다의 초상. 당연히 엄청나게 미화한 그림이다.>

흥행이 안 됐다. 헨델은 쿠초니와 보르도니가 왜 그렇게 오만했는지, 아니 애초에 자신이 왜 두 스타를 영입했는지 새삼 상기했다. 스타의 오만함도 극성인 팬덤도, 괜히 존재하는 게 아니었다. 스타와 팬덤이 흥행을 보장하기 때문에 존재하는 거였다. 하지만 이미 때는 늦었다.

설상가상으로 헨델은 왕실의 싸움에 휘말렸다.


하노버 왕가는 남자들끼리 사이가 안 좋았다.

조지 2세는 아버지 조지1세를 혐오했다. 어머니를 학대했기 때문이었다. 조지 2세는 아들인 왕세자도 혐오했다. 방탕하고 무책임하다는 이유였다. 아들은 아버지보다 일찍 죽어서 왕세자(즉 왕세손)은 맏손자가 잇게 되었다. 바로 이 프레드릭 왕세자는 조지 2세를 혐오했다. 할아버지가 아버지를 구박해서 죽게 만들었다고 믿어서다.

어떤 면에서 참 대단한 집안이다.

헨델이 2차 왕립 아카데미를 이끌 당시 국왕은 조지 1세의 아들 조지 2세였다. 손자인 왕세자 프레드릭은 할아버지를 괴롭히고 싶었다. 그런데 주상전하에게 직접 반항을 할 수는 없으니까 왕실의 자랑을 타격목표로 삼았다. 헨델이었다.

프레드릭은 오직 2차 왕립 아카데미를 괴롭히기 위한 목적으로 '귀족 오페라단'을 창립했다. 그는 헨델 밑에 있는 스타 가수와 연주자를 돈으로 빼왔다. 관객도 빼돌렸다. 티켓을 무료로 뿌리면 간단하다. 헨델의 인기곡은 바로바로 표절했다. 돈과 품이 안 드는 흑색선전은 당연한 덤이었다. 악기를 훔치는 짓까지 했다.

이렇게 나오면 버틸 방법이 없다. 결국 2차 아카데미도 문을 닫았다. 헨델의 입장에서는 회사가 부도난 셈이다. 그렇다고 포기할 헨델이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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헨델은 욕망에 솔직하기에 역설적으로 존경심을 불러일으킨다. 그의 위대한 점은 대중예술가로서의 정체성을 한 번도 잃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는 또다시 재기하기 위해 존 리치를 찾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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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리치! 자신을 몰락시키는 데 큰 역할을 한 <거지의 오페라> 기획자였다. 이걸로 떼돈을 번 리치는 평민, 서민 대상의 대중극장을 여러 채 소유하고 있었다. 서민도 관객이다. 그들도 구매력이 있음이 확인되었다. 그렇다면 그들도 문화대중이고 갑이다.

'대중 극장에서 대중과 직접 만나보겠다.'

자신을 괴롭힌 존 리치의 흥행력도 인정했다. 존 리치는 그대로 음악의 대가가 자신을 찾와와준 모습에 감복했다. 두 사람은 의기투합해 민간 오페라 극단을 만들었다.

헨델은 대중성을 위해 이탈리아 오페라의 형식에서 탈피해 다양한 실험을 했다. 발레리나의 공연과 발레곡을 삽입하고 합창을 넣기도 하는 등 파격을 시도했다. 이 시기 헨델의 오페라는 그의 오페라 커리어의 절정이다. 최고 수준이다.

그러나 영국에서 이미 오페라의 인기는 시들어버린 후였다. 모두 흥행에 실패했다. 수준과 대중성은 가끔 일치하지 않는다.


1737년이었다. 유럽 최고 수준의 오페라를 지속적으로 작곡하며 흥행에는 계속 실패하던 헨델은... 발작을 일으키며 쓰러졌다. 오른손 손가락 4개가 마비되고 정신도 오락가락했다. 병명은 중풍이었다. 회사로 치면 부도를 세 번 냈다. 제 아무리 강인한 체력의 헨델이라도 멈추지 않고 밀려오는 실패와 좌절을 이겨낼 수는 없었다. 사람들은 말했다.

“헨델은 끝났다.”

헨델은 고향인 독일의 아헨 지방으로 휴양을 갔다. 이 동네엔 온천이 있다. 의사가 하루 두 시간 온천욕을 처방하면 그는 온천에서 열 두 시간을 버티며 낫기 위해 애썼다. 헨델은 아직도 포기할 생각이 없었던 것이다.

재기할 것이다.
사람들 눈앞에 헨델이 누구인지를 증명해주마.
부와 명성을 다시 누릴 것이다!

헨델은 정신을 집중하고 회복에 힘썼다. 일 년이 지나자 건반 악기도 다시 칠 수 있을 정도로 상태가 호전되었다. 와신상담... 아니 온천상담을 마치고 다시 영국에 돌아온 헨델은 드디어 분명히 깨달았다.

<이탈리아어 오페라는 완전히 유행에서 벗어났다.>

이제 영국인들은 새로운 장르를 즐기는 중이었다. 오라토리오였다. 오라토리오는 독창보다 합창의 비중이 크고 연기의 요소가 없는, 노래만으로 이루어진 서사 장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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헨델은 오페라의 황제였지만 망국의 군주가 될 생각은 없었다.


헨델은 그에게 부와 명성, 그리고 전성기를 선사한 오페라를 버리기로 했다. 인생이나 마찬가지였던 이탈리아어 오페라였지만 그에게 대중의 호응만큼 확실한 성적표는 없었다.

'대중의 취향이 오라토리오라면 오라토리오를 쓰겠다.'

'대중이 영어 가사를 원한다면 영어로 작사하겠다.'

헨델은 쓰러지기 전에도 영어 오라토리오를 발표했었고 성공작도 있었다. 그러나 어디까지나 본업은 오페라 작곡가였다. 이제는 완전한 전향을 결심했다. 올인이었다. 속물인데, 그런데 대단하다. 이쯤 되면 숙연해진다.

1741년 런던에서 헨델은 드디어 한 오라토리오 작품의 작사 작곡을 마쳤다.

필생의 대표작인 <메시아>였다.

1742년, <메시아>는 런던이 아닌 아일랜드 더블린에서 초연되었다. 이 작품은 수도의 왕족과 귀족이 아닌 변두리의 서민층부터 공략했다. <메시아>는 지방 공연에서부터 시작되어 입소문을 타고 영국 전역을 석권한 후 마지막으로 런던을 포위했다.


<메시아 中 For unto us a child is born>

<메시아>는 1750년 런던에 입성했다. 런던 초연에는 국왕 조지 2세가 참석했다. 조지 2세가 <할렐루야> 합창에서 감동을 이기지 못하고 벌떡 일어난 사건은 유명하다. 왕이 일어섰으니 감히 앉아있을 수 없던 모든 청중이 따라 일어섰고, 이 때문에 <할렐루야> 파트에서는 청중이 일제히 일어나는 관습이 생겼다.

다른 설도 있다. 조지 2세가 마침 할렐루야를 합창할 때 지각하는 바람에 다들 일어났다고도 한다. 물론 유럽 본토에서는 전자가 마케팅 포인트로 유통되었다.

런던은 헨델과 <메시아>에 간단히 함락되었다. 지방을 접수하고 런던으로 상경한 것처럼, 이 작품은 거꾸로 영국에서 유럽 본토로 수출되었다. 문화 컴플렉스에 시달리던 영국인들에게 커다란 사건이었다. 헨델은 자랑스런 영어 가사 오리지널 작품의 창작자로서 영국의 보물이 되었다.


<메시아 中 Hallelujah>


한 평론가는 <메시아>는 예수님의 생애를 주제로 하고 있지만 사실 성스럽다기보다는 대중적 감동을 위한 블록버스터 히어로물이 아니나며 의심의 눈길을 보냈다.

'이거 찬송이 아니라 쇼 아닌가?'

당연히 쇼다. 애초에 헨델의 목표가 그거였다. 헨델은 전성기의 부와 명성을 다시 회복했다. 아, 이 맛이었다! 성공의 맛... 그러나 1850년 백내장을 앓게 되면서, 이듬해에 고통을 받는다.

헨델은 희대의 돌팔이 안과의사 존 테일러에게 걸렸다. 존 테일러는 이미 바흐의 눈도 실명시킨 적 있는 미친놈이었다. 이제는 헨델을 망가뜨릴 차례였는지 영국에 와서는 그의 두 눈을 실명시켜버렸다.

존 테일러는 의학계에서 돌팔이의 대명사로, 하나의 상징처럼 통용되는 녀석이다. 이 인간은 프랑스에 가서는 폴란드 왕자의 눈을 치료했고 독일에 가서는 영국 공주의 눈을 번쩍 뜨게 했다는 식의 허풍 마케팅으로 환자를 유혹했다. 심지어 긴팔원숭이의 눈도 고쳤다고 허세를 부렸으니... 웃긴 건 존 테일러 이 인간, 말년에는 자기도 실명했다.

헨델은 실명의 고통 속에서도 창작과 흥행을 이어갔다. 1759년 사망할 때까지 계속해서 작곡했고, 계속해서 성공했다. 헨델은 영국에서 위인들만 묻히는 웨스트민스터 사원에 안장되었다.

헨델, 이 비범한 속물은 독일 작센의 할레에서 게오르크 프리드리히 헨델로 태어나 영국음악의 자존심 조지 프레드릭 헨델로 사망했다. R.I.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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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웨스트민스터 사원의 헨델 기념 조각>


헨델은 개인적으로는 문제가 많은 사람이었다. 성격도 나빴고 적도 많았다. 허나 세속적 욕구 충족을 위한 의지 하나로 인류에게 걸작을 남긴 위대한 뮤지션이기도 하다.

대중성이란 무엇인가? 흔히 대중적인 것은 덜 예술적인 것이며, 특히나 고전은 흥행성보다 숭고한 수준을 갖췄다고 여겨진다. 그러나 속물성과 예술성은 상반된 가치가 아니다. 이 두 가지는 비례하지도 반비례하지도 않는다. 밀접한 관련이 있기는 하지만 그저 존재하는 카테고리가 다른 것이다. 예술의 아름다움이란 창작자와 소비자의 욕망이 타협하는 가운데 나오는 경우도 많다. 자신의 욕망과 예술의 미에 동시에 봉사한 인물, 헨델의 삶이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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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봤습니다.
나름 클랙식좀 듣는다면서도 헨델은 잘 몰랐네요.
그 유명한 할렐루야가 헨델 작품이었군요.
돌팔이 의사 이야기는 참.......ㅋㅋㅋ

위대한 속물, 자신을 미화하지 않는데다 실력까지 갖춘 속물은 늘 재미있는 캐릭터인 것 같아요. 블록버스터 쇼라지만 저정도 퀄리티라면 누가 뭐라 할수 있겠습니까... 감사합니다!

반갑습니다 글 잘읽었어요~
팔로우 하고 갑니다~^^
시간나시면 맞팔 부탁 드릴께요!

존 테일러 ... 실제인가요?

ㅎㅎ 정말 재미있게 잘 읽었습니다!
대중성, 예술성, 속물성, 도덕성, ...... 참으로 어떤 정형화된 상관관계를 만들기 어려운 것들입니다.
피카소도 속물적 욕망을 통해 엄청난 작품들을 생산해 낸 작가라서 여러가지 생각을 하게 해 주는 글이었습니다.
잘 읽었고 종종 이런 시리즈 기대해도 될까요? 글을 넘 재미나게 쓰셔서용. 감사합니다 :)

헨델의 생애(?)를 듣고 나니 왠지 헨델이 아는 사람처럼 느껴지네요. 글 잘 읽었습니다!

글 잘 읽었습니다 !
좋은글 보팅, 팔로워 하고 가요 !
괜찮으시면 맞팔 부탁드릴게요 ㅎ
오늘도 좋은 하루 보내세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