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대 시절, 누구에게 선물을 줄 일이 있으면 책을 자주 선택하곤 했다. 나 역시 선물로 책을 곧잘 받곤 했다. 책 선물을 할 때면, 내게 감명을 주었던 책이 누군가에게도 똑같은 감명을 줄 거라는 착각 때문에 책을 포장하는 내내 기분이 들떴다. 마치 그 책을 받은 사람이 벌써부터 나와 똑같은 감동을 공유한 것처럼 말이다.
책을 선물할 때, 책 표지를 넘기면 나오는 내지에 짧은 편지를 썼다. 보통, 축하 메시지와 함께 ‘이 책을 고른 이유’와 ‘이 책이 네 삶에 어떤 영향을 주길 바란다’는 내용이 담겼다. 그때는 그 책들이 진짜 그들의 삶에 어떤 영향을 줄 거라고 생각했다. 지금 생각하면 우스운 일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또 책 선물을 하게 된다면, 비슷한 내용으로 편지를 쓰게 될 것이다. ‘이 책이 당신에게 아무 영향을 주지 않을 가능성이 농후한 걸 안다’고 쓸 수는 없잖은가.)
책의 내지에 편지를 쓰면, 책의 저자를 옆자리에 앉히고 선물 받을 이에게 전화를 거는 기분이 든다. 수화기에 대고 말하면서 책의 저자가 옆에서 작은 목소리로 하는 얘기도 함께 듣는 것이다. 저자가 곁에 있다는 든든함 때문인지 때로는 혼자 말을 건네기 어려운 상대에게도 메시지를 전하는 게 조금은 수월해진다.
중고 서점에서 책을 빼들어 책장을 넘기다보면, 편지가 적힌 헌책을 생각보다 자주 발견하게 된다. 책 속 편지를 발견하게 되면, ‘어? 이건 왜 여기에 있는 거지?’ 하는 생각이 먼저 든다. 책 속 편지라도 분명, 발신자와 수신자가 있고 편지가 적힌 책을 판매했다는 건, 편지도 함께 내놓았다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내 경우엔 아무리 나와 맞지 않는 책이라도, 편지가 적힌 책을 내놓진 않는다. 그 책은 책이면서 동시에 편지이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만난 책 속 편지의 주인공은 다양하다. 책의 저자가 직접 메시지를 적어 사인까지 한 증정본인 경우도 있고, 친구가 친구에게, 선배가 후배에게, 관계가 불분명한 누군가가 불분명한 성격의 메시지나 적지 않았으면 더 나았을 메시지를 적어놓은 것도 봤다.
최근에 책 속 편지를 본 건, 오키나와 여행을 마치고 김해 공항에서 내려서 들른, 중고 서점 김해점에서였다. 상태가 좋은 신형철 평론가의 <정확한 사랑의 실험>을 발견하고 설레는 마음으로 표지를 넘겼을 때, 내지 한 페이지를 가득 채운 편지를 발견했다. 내용은 대강 이렇다.
안녕, 누나. 누나의 하나뿐인 동생 OO이야. 천덕꾸러기가 나이 서른에 드디어 취업을 했다. 이 책은 작년 겨울, 너무나도 추웠던 겨울을 보낼 때 읽었던 책인데 너무 내용이 좋아서 여기저기 추천하고 다녀. 누나도 이 책 읽고 사랑의 의미, 가치 등에 대해서 생각해보는 유익한 시간 갖길 바라. 난 이 책 읽으면서 원망과 반성을 동반한 눈물을 흘렸어.
너무 멋진 매형과 예쁜 사랑 나누는 것 같아서 부럽고 좋아 보여. 이 책이 매형과 누나의 사랑의 불쏘시개가 되길 바라며.
편지의 수신자는 누나이고, 발신자는 남동생이다. 편지 내용으로 봤을 때 취업 기념으로 누나에게 이 책을 선물한 것 같다. 이 책이 내게 어떤 영향을 끼쳤고, 누나에게 어떤 의미가 되길 바란다는 내용도 들어 있다. 궁금한 것은, 동생의 선물인 이 책이 어떻게 중고 서점까지 흘러왔을까, 하는 것이다.
여러 가능성이 열려 있다. 누나가 책을 받고 꽤 세월이 흐른 후, 남동생의 편지가 있다는 걸 잊은 채 책을 처분했을 수 있다. 어쩌면 여러 권의 책을 처분하는 과정에서 이 책이 끼었을 지도 모른다. 동생의 바람과는 반대로 이 책이 누나와 매형 사이에 사랑의 불쏘시개가 되지 못했을 수 있다. 누나와 매형은 헤어지는 비극을 맞이하고 누나는 그와 관련된 모든 흔적을 지우기로 한다……. 아, 저렴한 추리다. 누나가 어떤 이유로 책을 처분했든지 간에, 동생의 편지가 있다는 걸 인지했다면 내놓지 않거나, 최소한 편지 부분은 찢어서 보관했을 테지.
한 가지 확실한 것은, 동생이 여기저기 추천할 정도로 좋았던 이 책이 누나에겐 별 감흥을 주지 못했다는 것이다. 감동을 받은 책을 처분할 정도로 냉혹한 이를 만나기란 쉽지 않다.
난 그 편지 때문에 평소 읽고 싶었던 신형철 평론가의 책을 두고 잠시 고민에 빠졌다. 아주 구하기 어려운 책이 아니라면, 편지가 적힌 책은 구입하지 않는다. 사고 나서도 내 것이 아닌 것 같은 기분이 들기 때문이다. 다행히 똑같은 책이 한 권 더 있어서 살 수 있었다. 책 가격은 같지만, 상태는 훨씬 좋은. 다음번에 이 책을 찾는 누군가는 유일한 선택지인 편지가 든 책을 두고 고민에 빠지게 되겠지. 아니, 어쩌면 사연 있는 책을 더 좋아할지도 모르겠다.
이십 대에 내가 편지를 적어 선물한 책들은, 지금 어떤 길을 가고 있을까. 20여년이 지난 지금도, 편지의 수신자가 그 책을 보관하고 있을까. 아니면 여러 사람의 손을 거쳐 내가 알지 못하는 누군가의 서가에 꽂혀 있을까. 어느 헌책방에서 내가 쓴 책 속 편지를 누군가가 읽고 나와 비슷한 생각을 할지도 모를 일이다. ‘왜 편지까지 적힌 책이 여기에 있을까.’ 하고.
언젠가 내가 편지를 썼던 책을 중고 서점에서 발견한다면 어떨까. 내 편지 아래에 처음의 수신자가 아닌 누군가의 답장이 덧붙어 있다면? 그 답장이 너무 인상적이어서 답장의 발신자를 내가 찾아 나선다면? 상상은 꼬리를 물고 이어진다. 어느새 소설의 얼개를 짜고 있다.
「세렌디피티」라는 영화에서 여자 주인공은 크리스마스이브에 만나 마음이 끌린 남자에게 연락처를 가르쳐주는 대신, 운명에 그들의 감정을 맡긴다. 고서에 자신의 연락처를 적어 헌책방에 팔고, 그 책이 결국 그 남자에게 닿으면 운명적인 사랑임을 확인하기로 한다. 몇 년 후 남자는 결혼 선물로 그 책을 받게 되고 남자와 여자는 운명적인 사랑을 향해 달려간다. 이 영화를 보고 여주인공은 로맨티스트보단 사디스트에 가깝지 않나, 생각을 하긴 했지만, 한 번쯤 해보면 재미있는 게임이 될 것 같다. 그렇지만 어쩌지, 난 이미 결혼을 했는데. 아내와 함께 조금 다른 조건을 걸고 해보는 거다.
책 하나를 정해서, 아내가 내지에 편지를 쓴 다음, 중고 서점에 파는 거다. 아내의 편지가 적힌 그 책은 내가 평생을 두고 찾을 미션 도서가 된다. 그 책이 어느 날 내 손에 들어온다면, 아내와 난 운명적인 사랑을 찾아 각자의 길을 가기로 하는 거다. 수십 년이 지난 어느 날 그 미션 도서가 내 손에 들어온다면, 난 노인 회관에서 만난 103동 할머니와 운명적인 사랑에 빠지게 될 것이다. 물론 기적적으로 젊은 나이에 책을 다시 손에 넣는다면 아직 할머니가 되지 못한 103동 아주머니와 사랑에 빠지게 될 것이다. 왠지 로맨스보단 스릴러에 가까운 이야기다. 진짜 그 책을 손에 넣는다면, 아내 몰래 책을 숨기거나 처분하게 될지도.
/중고서점 시리즈 에세이
P.S.
새 학기 준비로 정신 없는 나날들을 보내고 있습니다. 그런 이유로, 스팀잇을 들여다볼 여유가 없었습니다. 오늘 아내를 위해 몇 시간동안 봉사를 하고, 저녁 시간 도서관 방문을 허락받아 와 있습니다. 전에 써놓고도 올리지 못한 글을 올립니다. 밀린 때를 민 것 같아, 후련합니다.
오랜만에 반가운 글이네요. 새학기 준비로 바쁘셨군요. ^^
지난 시간 속에 만나 불같이 타올랐던 감정들이 책에 꽂힌 편지 한 통에 고스란히 담겨있다는 사실. 뭔가 나만 알고 있는 비밀이 생긴 기분이에요. 그 서적이 돌고 돌아 다시 나에게 올 확률이 얼마나 될지, 상상만으로도 즐거워지네요.
5년전 알라딘에서 아무생각 없이 든 소설책 한권에서 작은 쪽지를 발견한 적이 있어요. 별 내용은 아니였지만 그때 든 묘한 기분은, 마치 이 책을 읽은 그 둘만의 키득거리는 비밀 대화를 엿본 기분이였기에 잊혀지지 않아요. 뭔가..사연있는 책인것 같은? ^^ 전 더이상 읽지 않는 책이라도 편지가 글귀가 적혀있으면 가치가 올라간다는 느낌이 들어 팔지 않았는데, 한번 제 손에서 떠나보내는 것도 생각해볼만한것 같네요. 자주 와주세요 솔메님~
맞아요. 헌책에서 발견한 편지나 메시지는 그런 기분을 느끼게 하지요.ㅎㅎ 누군가가 그걸 쓸 때는 아주 뜨거운 감정을 품거나, 최소한 상대에 집중하면서 썼을 텐데 말이죠. 그 메시지들이 주인을 잃고 떠도는 걸 보면 참 묘한 기분이 들어요.^^
레일라님이 누군가와 만나고 이 사람이 나의 운명적인 짝인지를 알아보고 싶다면, 편지를 써서 헌책방에 팔아서 그 편지를 그 상대가 받게 될지 알아보는 것도 재밌겠지요.ㅋㅋ 하지만 위험한 방법입니다. 너무 오래 걸릴지도 모르니까요.
봄봄, 봄이 되면 자주 뵈어요. 봄봄, 봄이 옵니다.^^
짱짱맨 호출에 응답하였습니다.
감사합니다.ㅎ
스팀잇에 글 올리기와 때 밀기 재미있네요. ^^
글을 올리는 일은 때를 민 것 같은 상쾌함을 주지요.ㅎㅎ
li-li님이 kyslmate님을 멘션하셨습니당. 아래 링크를 누르시면 연결되용~ ^^
li-li님의 [SLBC NEWS ROOM] #190222 Headline @codingman님의 컴퓨터는 덧셈만 존재한다.
쌩유ㅎ
말씀하신대로 편지가 적힌 책은 오래 간직하게 되는 것 같아요.
그 남매에게는 과연 어떠한 일이 있었을지 궁금하군요^^
정말로 한번 아내분과 미션을 수행해보시면 재미있겠군요.
그럼 쏠메님은 열심히 찾으실 건가요? ㅎㅎㅎ
ㅎㅎ 예전엔 책에 편지를 써서 선물을 하곤 했는데, 요즘은 잘하지 않아요. 책은 상대가 읽고 싶은 걸 사줘야 읽을 확률이 높더라구요^^
아내와의 미션은 여러모로 제게 이득이 없을 듯요ㅋ
여주인공은 로맨티스트보다 새디스트, 맞는 거 같아요. ㅎㅎㅎ
책에 함부로 글을 쓰면 안되겠구나 싶어요. ^^
운명을 시험하는 일은 영화 속에서만ㅋㅋ
책 속에 편지를 쓸 땐, 그 책이 여러 사람에게 읽힐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먼저 해야할듯요ㅎ
이렇게 없는 시간을 내서 책을 읽으시는 선생님을 보면 뭔가 대단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
없는 시간인데, 책 읽기에 집중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아 늘 아쉽습니다ㅎ
책 선물은 많이 했어도,,, 책에 편지를 써본 적은 없는... 아~~~ 저도 해보고 싶어요. ^^
ㅎ 책에 쓴 그 편지를 여러 사람이 읽어도 좋다면, 쓰셔도 괜찮을 거 같아요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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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wifi님의 스팀잇 딱 1년 된 날! 감사 인사 전합니다!
곧 개학이시겠네요.
전 몇번의 책 정리 후에 지금은 최소한의 책을 가지고 있습니다.
처음 책을 정리할 때는 정말로 이대로 이별인가하는 마음에 참 힘들었지만, 이제는 책을 소유하지 않는 습관이 조금은 생긴 거 같습니다.
그래서 책에 편지를 쓰는 일도, 책에 줄을 긋는 일도 이제는 거의 하지 않게 되더라구요.
로멘스이든 스릴러이든 소설 하나 또 쓰시겠는걸요?ㅋㅋ
개학 준비로 분주한 일상을 보내고 있어요^^
책을 정리하셨군요~~ 전 아까워서 책 못 내놓을 거 같은데요,, 과감한 결단이 있어야 책 정리가 가능할 거 같네요. 책장이 포화 상태가 되어 더이상 수용하지 못하게 되면 정리에 들어갈지도 모르겠어요ㅎ
소설이든, 에세이든 뭔가를 늘 쓰고 있는 사람이고 싶어요^^
fur2002ks님이 kyslmate님을 멘션하셨습니당. 아래 링크를 누르시면 연결되용~ ^^
fur2002ks님의 2월의 마지막~ 멋진 봄을 맞이합시다! (뻘짓 진행사항)
kyslmate님 공모전 건으로 연락드릴일이 있는데요. 제 오픈카톡으로 연락부탁드립니다 https://open.kakao.com/o/s3k7SQP
네 연락드립니다^^
솔매님 많이 바쁘신가봐요~!
그만큼 가족과 일과 일상에 열정이 넘치신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저도 연애할때 아내님에게 준 책 두권의 행방을 찾아봐야겠네요. 손발이 오그라드는 편지내용을 빨리 삭제시키고 싶습니다 ㅋㅋㅋ
즐겁고 행복한 한 주 보내세요!!
넵,, 새 학기 준비하느라, 또 애들하고 시간을 보내고, 개학해서는 학기초 업무에 분주하다보니, 절대적인 시간은 예전과 비슷해도 정신적으로 더 분주하여 모니터 앞에 있을 여유가 없었네요.ㅎ
이제 다시 마음을 다잡고 읽고 쓰는 싸이클을 회복해야겠습니다^^
손발이 오그라드는 편지 내용 삭제하시기 전에, 스팀잇에 함 올리시지요ㅋㅋ 팥쥐님도 즐건 날들 보내세요!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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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avelwalker님의 여행기 공모 당선공지 및 트립스팀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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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i-li님의 평론가들의 도서리뷰 # 62 (1902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