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0번의 구타 Les quatre cents coups The 400 Blows

in #kr7 years ago

400번의 구타 Les quatre cents coups      


감독 : 랑수아 트뢰포 ( Francois Truffaut )

출연 : 장 피에르 레오, 클레어 모리어

개봉 : 프랑스 1959


"떡밥만 가득한 소설.... 사시겠어요? 아, 이미 있으시군요."


 속칭 소설이나 이야기에서 ‘떡밥’이라는 표현을 쓴다. 여기서 떡밥은 복선을 말한다. 앞으로 일어날 사건에 대해 미리 독자에게 암시를 하거나 흥미를 유발 시키는 것이다. 독자는 소설 속의 복선을 보고 앞으로 사건이 어떻게 전개될지 유추하고, 그 복선이 어떤 장치로 사용되는가에 대해 흥미를 가진다. 복선은 앞으로 일어날 사건을 예견하기도 하고, 혹은 그 복선을 통해 만들어진 추리를 전복시키는데 사용하기도 한다. 그래서 낚시를 할 때 미끼 중 하나인 떡밥이 속칭 복선의 의미를 지니는 것도 이러한 이유 때문이다.  복선은 독자들의 흥미를 불러일으키는 장치이자 이야기의 개연성을 부여하는 근거가 되기도 한다. 어떠한 사건의 해결에 복선은 중요한 근거로서 작용하고 독자들은 복선을 그 사건의 해결을 납득하게 된다. 그래서 좋은 복선과 해결은 좋은 이야기를 만들어내는데 중요한 요소 중 하나라고 할 수 있다. 복선은 상상의 토대를 만들어내는 작업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본 『400번의 구타』에서도 많은 ‘떡밥’들이 등장한다. 주인공 앙투안의 어머니가 모르는 남자와 키스를 하는 장면, 구치소에서 젊은 남자와 대화를 나누고 장면(아직도 젊은 남자가 무슨 범죄를 저질렀는지 궁금하다.), 다시 탈주 계획을 세우는 감화원 소년의 이야기 등 을 들어볼 수 있다. 하지만 이러한 장면은 어느 것 하나 제대로 된 설명이 없다. 심지어 결말도 열린 결말이라니.  영화 『400번의 구타』는 관객들에게 어떤 사건의 결말 혹은 설명을 하지 않는다. 그저 보여줄 뿐이다. 문제아로 낙인찍힌 앙투완이 어떻게 세상을 만나는지가 중요할 뿐이다. 앙투완의 이야기는 마치 ‘떡밥만 가득한 소설’과 같다. 어떤 것도 제대로 된 해결이 제시되지 않고, 어떠한 결말도 이끌어 내지 않는다. 그리고 이 소설은 앙투완만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도 하나씩 소장하고 있다. 사무엘 베케트의 『고도를 기다리며』처럼 이해할 수 없는 행동들과 부조리로 가득한 소설 말이다.     

 “제가 문제아라구요?”

 문제아로 낙인찍힌 앙투완은 그저 문제아로 치부될 뿐이다. 그는 문제아이고 성적이 좋지 않으며 말썽만 부리는 거짓말쟁이이다. 어른들은 문제아 앙투완을 어떻게 ‘처리’할 것인지에 대해 고민한다. 어떻게 하면 버릇을 고치고, 문제없는 아이를 만들 것인가에 대한 어른들을 고민을 들을 때면, 앙투완은 그저 빤히 그 말을 하는 어른을 쳐다볼 뿐이다. 그가 보기에 자신을 향해 ‘문제아’라고 낙인찍는 이들을 보면 이상한 기분에 사로잡힐 뿐이다. 세상은 문제 투성와 부조리로 가득 차 있고, 자신을 향해 비난하고 설득하는 이들 또한 문제투성이인데 ‘왜 자신만 문제아라고 하는가.’ 앙투완은 “이해할 수 없다.”라고 이야기한다. 자신을 보고 문제아라고 비난하는 문제투성이도 이해할 수 없고, 자신이 왜 학교를 가야하고, 벌을 받아야하는지 이해할 수 없다. 자신이 보기에 어차피 엉망진창 구더기 속에서 조금 더 엉망이 된다고 해도 별반 다를 바 없어 보이기 때문이다. 같이 문제투성이인데 왜 그저 멍청한 문제아인가? 돈이 없어서인가? 자립하지 못하기 때문인가? 앙투완은 더 이상 문제아가 되지 않기 위해 가출을 결심한다. 아버지에게 보란 듯이 자랑스러운 아들이 되어 만나자고 말한다. 앙투완이 보기에 자신이 문제아인 이유는 돈이 없기 때문이다. 순진하고 영악하지 못한 앙투완이 문제아로 낙인찍힌 이유에는 삶은 언제나 자신을 배반한다는 사실을 몰랐기 때문이다. 앙투완은 그 나름대로 합리적으로 생각하고 판단한다. 단지 그는 요령이 부족했고, 그의 생각보다 세상은 더 비합리적이었다. 발자크에게 기원하기 위해 촛불을 켰다. 어머니를 싫어하는 이유는 어머니가 자신을 싫어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문제아가 되지 않기 위해 가출을 했다. 돈이 필요해 타자기를 훔쳤고, 또 필요가 없어져서 타자기를 돌려놓았다. 그는 그 자신 나름에 판단에 따라 행동한다. 그리고 결과는 언제나 엉망이며, 언제나 문제아일 뿐이다. 그는 그저 자신의 나이에 맞게, 그리고 자신이 생각하기에 합리적으로 행동한다. 단지 그는 그 ‘합리’라는 단어가 세상과 그리 친하지 않다는 사실을 모를 뿐이다.    

 “달리고 보니, 여긴 어디죠?” 

감화원에서 탈출한 앙투완은 끊임없이 달린다. 그는 계속해서 달려 달릴 수 없는 지점까지 이른다. 그리고 그제 서야 앙투완은 고개를 뒤로 돌린다. ‘달린다.’는 것은 많은 의미를 내포한다. 달리는 것은 ‘지향성’을 지니고 있는 어디론가 향하는 행위이다. 달리는 것은 걷는 것과도 다른데, 어딘가를 향해 가는 것은 같지만 걷는 것이 주위를 둘러볼 수 있는 여유가 있다면 달리는 것은 오직 달리는 그 방향만을 바라보게 된다. 달리는 것은 걷는 것에 비하면 아주 극심한 육체 행위이다. 달리는 것을 계속 유지하는 것과 앞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힘겹다. 이 힘겨운 육체노동은 자신의 행위 이외에는 어떠한 집중의 분산도 요구할 수 없게 만든다.  우리는 달리는 것을 흔히 ‘앞만 보고 달렸다’ 혹은 ‘앞만 보고 달리지마라’라는 식으로 인생을 비유하는데 쓰인다. 그것은 달리는 것이 시간의 연속성, 지향성의 의미를 내포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뒤돌아 볼 수 없다는 점도 의미하기 때문이다. 앙투완이 달리는 장면은 과거의 자신의 인생에 대한 이야기임과 동시에 앞으로의 이야기를 내포하고 있는 것 같다. 앙투완의 달리는 모습 속에서 우리는 왜 앙투안이 문제아일 수밖에 없는지 알 수 있다. 문제아 앙투완은 부조리한 세상에 그저 ‘반응’해왔다. 그는 나름의 합리대로 행동했지만 그가 문제아로 남을 수밖에 없는 이유는 바로 부조리한 세상에 그저 반응하였기 때문이다. 그는 스스로 의문을 표하지만 자신 앞에 놓인 상황에 맞춰 행동한다. 그에게 돌이켜보거나 반추하는 행위는 찾아볼 수 없다.  그는 세상이 문제투성이지만 여전히 믿을 만한 것으로 생각했다. 당연한 것은 당연한 것이라 여겼다. 어린 앙투완에게 자신을 둘러싼 세상은 의심할거리가 없는 것이었고 그에 맞춰 살아가면 되었다. 세상의 문제들이 자신에게 놓였을 때, 단순히 풀어나가면 될 것이라는, 세상은 믿을 만한 것이라는 순진한 생각이 그를 감화원으로 들어가게 만들었다. 그리고 그를 달리게 만들었으며, 마지막에 그 끝에 다다르게 된다.  그가 끊임없이 달려가 도착한 세상의 끝에서 그는 더 이상 달릴 수 없음을 깨닫는다. 그리고 영화는 당혹스런 눈동자로 고개를 뒤로 돌리는 앙투완의 얼굴을 클로즈업하며 끝이 난다. 앞으로 그에게는 무슨 일이 일어날까? 앞으로 어떠한 삶이 펼쳐질까? 관객들은 알 수 없다. 물론, 앙투완 연작을 그의 미래라 이야기 할 수 있겠지만 필자는 굳이 그러고 싶지 않다. 좀 더 자유로운 상상에 몸은 내맡겨 여운을 좀 더 의미하고 싶다. 앙투완의 어머니는 앙투완에게 자신도 앙투완과 같을 때가 있었다고 말한다. 하지만 그것은 사실 과거의 사실이 아니라 여전히 앙투완인 것이 아닐까? 앙투완의 어머니도, 우리도, 앙투완도 말이다. 우리 모두 여전히 답을 내리지 못한다. ‘여기’가 어디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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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 제가 좋아하는 영화네요. 개인적으로 고다르보다 트뤼포입니다.

누벨바그 영화를 좋아하는 사람들 보면 언제나 고다르냐 트뤼포로 나뉘어지는 것 같습니다. 마치 고다르와 트뤼포가 마지막까지 앙숙이었던 것처럼요. 저도 고다르보단 트뤼포 영화가 더 마음에 와 닿는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