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드스톤의 횡설수설) 6.25 그리고 백선엽

in #oldstone6 years ago

오늘은 한국전쟁이 발발한지 68년째 되는 날이다. 어릴때 부터 부모님들께 한국전쟁 당시 고생하신 이야기를 많이 들었다. 한국전쟁은 동족상잔의 비극이었다. 동족상잔의 비극이라는 말이 무슨 의미일까? 형이 동생을 죽이고 삼촌이 조카를 죽이고 친구가 친구를 죽이는 전쟁이었다. 어떤 일이 있어도 김일성을 용서할 수 없는 이유이기도 하다. 그는 같은 이웃과 친구 가족들끼리 서로 서로 죽이게 만들었던 것이다. 한때 대학가에서 주사파니 하면서 김일성을 추종하는 이들이 있었다. 아직까지 우리나라 정계에는 그런 사람들이 많이 진출해 있기도 하다. 사회주의를 공부했던 사람으로서 우리나라의 진보정치라는 것에 환멸을 느낀 이유이기도 하다.

며칠전에 연세대 사학과 교수였던 김동길 선생이 조선일보에 백선엽에 대한 평을 쓴 글을 보았다. 여간해서는 조선일보를 읽지 않지만 우연히 보게 되었다. 내용인 즉, 그는 한국전쟁당시 낙동강 전쟁의 전세에 결정적으로 기여한 다부동전투를 승리로 이끌었으며 교통부 장관으로 지하철을 처음 만들었을 뿐만 아니라 국민들이 추대해서 명예원수로 모시려고 하다가 좌절되었으나 자신의 공에 대해서는 한번도 자랑하는 말씀을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한마디로 그는 위대한 인물이었다는 것이다.

역사는 승리자의 것이란 말이 있다. 현대사는 오래 살아 남는 자들의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김동길 교수는 역사학 전공자다. 그런 분이 백선엽을 일방적으로 칭찬하는 글을 쓴 것은 이해할 수 없다.

사람은 신이 아니다. 따라서 어두움과 밝음이 동시에 존재한다. 어떤 면을 보느냐에 따라 훌륭한 사람이 되기도 하고 나쁜 사람이 되기도 한다. 역사학자는 이런 명암의 균형을 잘 보아야 한다. 등소평이 모택동을 공7과3이라고 한 것은 그런 이유 때문인 듯하다. 중국이 지금과 같은 발전을 할 수 있었던 것은 등소평과 같은 균형잡인 사람이 지도자를 오랫동안 한 덕분이 아닌가 생각하기도 한다.

백선엽은 오랫동안 살아 남은 덕을 톡톡히 본 사람이다. 백선엽의 삶을 보면 아무리 보아도 김동길 선생처럼 후하게 평가할 수 없다. 그는 처음부터 정치군인이었다. 그는 만주군에 들어가 독립군을 잡아 죽이는 특설대에 근무를 했다. 그가 공비토벌에 특별한 재능을 보였던 것도 만주에서 유격대 활동을 하던 독립군을 토벌했던 경험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해방이후 조만식의 비서이기도 했다. 조만식을 민족주의자로 이야기하지만 나는 유보적인 생각을 갖고 있다. 민족주의자였다면 어떻게 독립군 토벌대장이던 백선엽을 비서로 쓸 수 있었을까?

국군에 들어간 백선엽은 한국전쟁 발발당시 육군본부에서 정보 작전 분야의 부장을 담당했다. 며칠전 타계한 김종필을 육군본부로 픽업한 사람이 백선엽이다. 박정희와 김종필은 김일성이 1950년 6월에 도발할 것을 정확하게 예측했고 그것을 보고서로 만들었다. 그러나 그들의 보고는 묵살이 되었다. 6월 24일 육군회관 개관식에서 당시 육군총장 채병덕과 육군의 전 장군들이 술이 떡이 되도록 마셨고 전쟁이 발발하자 전군이 손하나 못쓰고 무너질 때 그는 전군의 작전대비태세를 담당하고 있던 작전부장이었다.

전쟁이 발발하자 그가 사단장으로 있던 1사단은 궤멸적인 패배를 당했다. 일설에 의하면 백선엽은 농민복장으로 전선을 이탈했다고 한다. 쉽게 말하면 탈영을 한 것이다.

그는 전쟁보다 정치에 탁월한 재주를 보였다. 전군이 무너졌을 때 아무런 희망이 없을때 홀로 나서서 한강선 방어선을 구축했던 김홍일 장군을 계책을 써서 군복을 벗게한 것도 백선엽이었다. 그는 부산에서 이승만에게 “각하의 뒤를 이을 사람은 김홍일 장군뿐입니다”라는 말을 했다고 한다. 위기감을 느낀 이승만이 지체없이 “임자 수고했어” 하고는 김홍일의 군복을 벗겼다.

백선엽은 미군으로부터 좋은 평가를 받고 있는 듯하다. 들리는 말에는 사단장, 군단장, 군사령관을 할때 미군 고문관을 자신의 짚차 앞자리에 태우고 자신은 뒷자리에 탔다고 한다. 군에 다녀온 사람은 알 것이다. 지휘관 짚차 앞자리가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는지 말이다. 그렇게 그는 미군의 환심을 샀고 그래서 미군의 지원을 받아 출세를 했다.

그러던 그를 몰아낸 것은 김종필이었다. 김종필을 중심으로 한 정군파들이 당시 군의 지도부들이 썩었으니 나가라고 했다. 김종필은 감방에 갖혔으나 결국 군수뇌부들은 모두 옷을 벗고 나갈 수 밖에 없었다.

그 이후 백선엽은 한국의 대표적 부정축재자로서 명성을 날렸다. 어르신들은 다 아실 것이다. 선인재단의 비리는 숨을 쉴 수 없을 정도였다.

만년에는 자신의 업적을 치장하는데 모든 노력을 다했다. 한국전쟁 당시 낙동강 방어선에서 다부동 전투란 지금과 같은 의미가 아니었다. 오랫동안 전쟁사를 위조하는데 노력한 결과 낙동강 방어선을 지키게 한 것은 다부동전투라는 생각을 갖게 만드는데 성공했다. 대중의 인식을 조작하는 것이 얼마나 쉬운가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예이다.

이명박은 백선엽을 명예원수로 추대하려고 했다. 그러나 실상 명예원수로 추대하려고 한것은 백선엽 자신이었다. 그는 수없이 많은 돈없고 배고픈 예비역 군인들을 꼬여서 자신을 명예원수로 추대하도록 만들었다. 나는 그런 꼬시김을 들었던 사람들의 이야기를 많이 들었다. 결국 자신을 명예원수로 추대하려고 했던 꼼수는 명예를 소중하게 여기는 몇몇의 의로운 군인들에 의해서 좌절되었다.

김동길 교수는 백선엽을 자신의 공을 한번도 자랑하지 않은 훌륭한 사람이라고 한다. 참 기가찰 노릇이다.
백살 넘게 살면서 자신의 잘못은 모두 묻어 아무도 보지 못하게 감추고 자신이 하지도 않은 것도 자신이 한 것처럼 조작했다.

그런데 말이다. 역사는 냉혹하다. 자신이 살아있을때는 그렇게 보일지 모른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 그 누구도 비판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오늘날 우리에게 한국전쟁의 의미는 무엇일까 ? 그리고 백선엽은 어떤 인간일까 ?
김동길 교수의 조선일보 칼럼을 보면서 다시한번 생각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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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복 후 친일을 청산하지 못한게 가장 아쉬운 부분입니다.

광복이후 한국전쟁까지 남한에서의 친일파 청산문제로 인해 내전이 발생할 수도있다고
미국의 정보기관이 보고한 적도 있습니다. 남한의 친일파 청산이 제대로 되지 않아 내전이 발생할 수 있다고 말이지요.
대구폭동 사건을 대표적인 것으로 예를 들어서 보고했지요.
왜 친일청산이야기하고 공산화를 연결하는지 알지 못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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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잘읽었습니다..

Am gonna use the goggle translator to get what youre trying to say.

좋은글 감사합니다...

몰랐던 내용들을 글을 통해서 잘 보고 갑니다.
오늘이 6.25일이였군요. 바쁘다보니 그냥 월급날로만 인식했었네요.

이런 면도 있는 인물이었군요. 잘 읽었습니다.

올드스톤님 글보고 알게 되었네요!!
한국전쟁에 대해 생각해봐야겠습니다 편안한 하루되세요 올드스톤님^^

새로운 사실을 덕분에 알게되었습니다.
역사를 제대로 인식하고 전파하는 일부터 우리 스스로가 노력해야 할것 같네요.
백선엽에 대해서 좀 더 궁금해지네요. 인터넷에서 따로 검색해 찾아보겠습니다.

明暗 ....

이런 단면도 있군요. 역사의 또다른 시선을 보고갑니다!!

백선엽, 김동길, 두 사람 모두 일제시대의 친일파 가문에서 잘 살다가 해방이후에 지식인층과 권력가 출신이 국가재건에 필요로 할 때에, 운좋게 자리를 잡았던 사람들 아닌가요? 김동길 교수는 비록 그보다는 후대이지만, 그 역시도 친일파 가문의 후손이자 정치적 색이 상당히 보수적이잖아요,

분단 때문에 북한만이 아니라 한국에서도 객관적인 역사 연구가 힘들었죠. 그때문에 과거사 진상 규명회니 말이 많은 것이겠지만....

역사는 냉혹하다. 자신이 살아있을때는 그렇게 보일지 모른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 그 누구도 비판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이 부분에서 정말 틀린 말이 아니란 점에
더 소름 돋고 갑니다...

 6 years ago (edited) Reveal Comme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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