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 하느님이 보우하사

in #kr-pen6 years ago

자잘한.jpg


그러니까 이 일은, 무려 이십여년 전의 일이다.


달라도 너무 달라


나와 같아서 좋은 친구가 있고, 나와 달라서 좋은 친구가 있다. 같은 영화에 울고, 같은 노래에 감동하고, 같은 작가를 좋아해서 찌찌뽕하며 즐거워하는 친구가 있는가 하면 나 혼자서는 절대로 하지 못할 행동을 함께 하고, 가지 못할 장소에 함께 가고, 먹지 않을 음식을 시도해보게 돼서 색다른 친구가 있다.

그녀는 후자였다.

내성적이고 조용한 나와는 달리 그녀는 대담했고 외향적이었다. 거리낌이 없었고 늘 매사에 자신만만했다. 나는 그런 그녀가 부러웠지만 나는 결단코 그렇게 될 수 없음을 잘 알고 있었다.

평상시에는 그녀의 다름이 큰 문제가 되지 않았다. 오히려 새로운 경험으로 날 이끌어줬기 때문에 약간 신기해하며 그녀를 따라다니곤 했다. 달라도 너무나 다른 그녀와 내가 사사건건 부딪히게 된 것은 우리가 여행을 떠나면서였다.

대학 친구들 여섯이 함께 제주도로 여행을 떠나기로 했다. 아직 학생들이었지만 뭐가 그리 바빴는지 서로 일정을 맞추는 게 여간 어렵지가 않았다. 서울에서 함께 떠날 수가 없어서 각자 자신의 고향에서 출발한 뒤 제주도에서 만나기로 했다. 친구들보다 비교적 시간 여유가 있었던 나는 혼자서 여행을 더 즐기기로 했다. 전라도에 내려가 그때 당시 한참 유행했던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에 나온 유적지를 구경하고, 목포에서 제주행 배를 탈 작정이었다.

겁도 많고 소심한 내가 혼자서 여행이라니. 너무나 떨렸지만 이 여행이 나의 작은 껍질을 부수고 밖으로 나올 수 있는 기회가 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때 그녀가 끼어들었다. 마침 자기도 시간이 빈다면서 나의 전라도 여행에 동행하겠다고 했다. 저 친구와 단둘이 여행이라니. 과연 어떤 일이 펼쳐질까?


조심성 vs. 자신감


나의 기대는 곧 짜증으로 바뀌어갔다. 그녀와 내가 참 많이 달랐기 때문이다. 나는 걷는 걸 좋아했다. 평소에도 한 시간은 기본으로 걸어다녔는데, 여행을 떠났으니 본격적으로 더 많이 걷고 싶었다. 하지만 그녀는 계속 다리가 아프다며 차를 타자고 했다. 조용히 사색하며 걷는 여행을 하고 싶었던 나는 실망이 컸다.

나의 껍질을 깨고 밖으로 나오려던 계획도 무산됐다. 소심한 나는 낯선 사람에게 길을 묻는 것도 무척 어려워했는데, 혼자 할 계획이었던 이번 여행에서 조금 더 용기를 내어보려고 했다. 그런데 내가 워낙 소심하다는 걸 알고 있는 이 친구는 그런 기회가 생길 때마다 자기가 나서서 사람들에게 길을 묻고, 여기저기 알아보러 다녔다. 분명 나를 배려한 행동이었지만 이미 심사가 뒤틀린 나는 그것도 예뻐 보이지 않았다. 내가 용기를 내어 나설 기회를 앗아간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전라도에는 우리집의 먼 친척이 살고 계셨는데, 어찌하다보니 우리는 그 집에서 하룻밤을 보내게 됐다. 전혀 나의 계획에 없던 일이었다. 살면서 한 두어번 뵀을까 말까한 분의 집에서 느닷없이, 그것도 친구까지 한 명 데리고 신세를 지다니. 오래 전 일이라 도대체 어떻게 해서 하룻밤을 자게 됐는지는 가물거린다. 분명 예의상 자고 가라고 하신 걸 텐데...

괜한 신세를 지는 거 같아 가시방석인 나와는 달리 그녀는 남의 집에서 온수를 틀어달라고 부탁을 하고는 (시골 집이라 온수를 쓰려면 보일러를 틀어야 했다) 목욕까지 마치고 나왔다. 그러더니 친척 아주머니에게 뭔가를 또 부탁한다.

그때 우리는 식비를 아끼기 위해서 서울에서부터 각자 먹을 쌀을 배낭에 챙겨갔었다. 도보여행을 계획한 나로서는 좀 무겁긴 했지만, 이 정도쯤이야 여행의 묘미로 여길 수 있었다. 그런데 쌀을 하나도 가져오지 않고 맨몸으로 다녔던 그녀는 나의 친척 아주머니께 "쌀 한 봉지 좀 주시라."고 부탁했다.

너는 쌀 필요없느냐고 물으시는 아주머니께 나는 손사래를 쳤다. 연락도 없이 들이닥쳐서 하룻밤을 자고, 군입도 둘이나 늘었는데, 보일러를 틀어 온수까지 빼서 쓰고, 이제는 쌀까지 달라고 하다니.

아, 나만 좌불안석인 것인가.


하느님이 보우하사


우리가 또 하나 첨예하게 대립한 것은 바로 히치하이킹이었다. 걷는 걸 좋아하고, 또 애초에 도보여행을 꿈꿨던 나는 걷고 싶었는데, 배낭에 쌀 봉지도 없었던 그녀는 계속 다리가 아프다며 최대한 차를 타고 이동하려고 했다. 손을 든다고 아무나 태워줄 리도 만무했고, 모르는 사람의 차를 얻어타는 건 위험하지 않냐고 하자 그녀가 대답했다.

"걱정 마. 하느님은 날 사랑하시니까."

참, 내가 말을 했던가. 그녀는 목사님의 딸이었다.

하느님은 자기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위험한 일은 절대 안 일어난다는 거였다. 하지만 날라리 신자로 성당도 곧잘 빼먹던 나는 나에 대한 하느님의 사랑을 확신할 수 없었다.

내 심기가 불편하거나 말거나 그녀는 지나가는 차를 향해 손가락을 내밀었고, 차 몇 대가 지나간 후 드디어 하얀색 승용차가 한 대 멈춰섰다. 혼자 운전하고 있던 아저씨는 흔쾌히 우리를 태워주셨고 다음 버스 정거장에서 내려주시겠다고 하셨다. (시골 길이어선지 정거장이 띄엄띄엄 있었다.) 그런데 우리의 목적지가 "고산유물 전시관"이라는 걸 들은 아저씨는 마침 그곳에 가는 길이라며 전시관까지 우리를 데려다 주셨다. 알고 보니 이 아저씨는 그 전시관에서 해설사로 일하시는 분이었던 거다. 덕분에 해설 시간이 아닌데도 아저씨께서는 친히 우리에게 전시관 투어를 시켜주셨다.

전시관에서 나올 때도 버스가 다니는 큰 길까지는 걸어야 했지만, 운이 좋게도 마침 그곳을 나오는 트럭이 있어서 그걸 얻어타고 시내까지 나올 수 있었다. 계획했던 도보여행도 못하게 됐고, 위험할 수도 있는 낯선 사람의 차를 얻어타서 굉장히 화가 났지만 우연히 행운이 겹치고 있어서 짜증을 낼 수도 없는 묘한 상황이 지속됐다.

우여곡절 끝에 그날 머물 숙소를 구하고 짐을 풀었다. 그런데 우리가 너무 늦게 도착하는 바람에 부엌을 쓸 수가 없었다. 아직 저녁을 못 먹은 우리는 하는 수 없이 가까운 마트에 가서 먹을 것을 사오기로 했다. 숙소는 동네 안쪽에 있었고, 시골 길이라서 마트까지 가려면 내리막을 한참 걸어가야 했다. 이렇게라도 걷게 되는군, 하며 나와 친구는 숙소를 나와 터덜터덜 길을 걸어갔다.

그런데 1분도 채 지나지 않아 뒤쪽에서 오던 검은 승용차 한 대가 우리 옆에 멈춰섰다. 아니, 이번엔 손도 안 들었는데 왜 멈추는 거냐고. 저 아래 큰 길까지는 한참 걸릴 테니 차를 태워주겠다는 거였다. 이런 일은 절대 사양하지 않는 그녀는 얼른 그러마고 했다. 우리가 차 뒷좌석에 올라타자 앞좌석에 있던 두 아저씨들은 다 늦은 저녁에 왜 큰 길까지 나가려 하냐고 물으셨다. 저녁거리가 없어서 사러 간다고 하자 아저씨가 말씀하셨다.

"어, 우리 음식 남은 거 있는데. 그거 먹을래요?"

두 분은 여행을 마치고 서울로 돌아가시는 길이었고, 마침 남은 음식이 있다는 거였다. 해도 졌는데 굳이 힘들게 큰 길까지 걸어갔다 오지 말고 자기들 음식을 먹으라고 나눠주셨다. 하얀 일회용 스티로폼 상자에 담긴 음식을 뭔지도 모른채 넙죽 받아들고, 우리는 다시 숙소로 돌아왔다.

방 안에 들어와 아저씨들이 주신 상자를 펼쳤다. 입도 안 댄 떡이며 잡채가 가득 들어있었다. 잔뜩 배가 고팠던 우리는 얼른 젓가락을 들었다. 역시 뱃속에 먹을 게 들어가자 기분도 풀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뭔가 기분이 묘했다. 난 분명 화가 났었는데, 화를 내기엔 상황이 너무나 잘 돌아가고 있었다. 나의 이런 복잡미묘한 기분과 달리 친구는 너무나 평온해 보였다. 맛나게 음식을 다 먹은 후, 친구는 거울을 꺼내들고 족집게로 눈썹을 뽑아 정리하기 시작했다. 이런 세상의 모든 호의는 너무나 당연하다는 듯이. 그 모습을 보며 나는 속으로 생각했다.

그래 어쩌면 하느님은, 너는 사랑하시는지도 모르겠다.


Sort:  

재밌게 읽었네요.^^
취향이나 성격이 너무도 다른 두 사람이 몇일을 꼬박 붙어 있는다는게
두 사람 모두에게 재밌는 것도 같고 힘들 것도 같고...
정적인 사람과 활동적인 사람, 수동적인 사람과 적극적인 사람,
조심성이 몸에 밴 사람과 뭐든 낙관적인 사람...재밌네요.^^

서로 달라도 너무 달라서... ㅋㅋㅋ
지금은 웃으며 추억할 수 있는데 그때는 고생 좀 했어요. ^^

여행은 맞는이와 하는게 맞죠 혼자 하던지
하지만 한번쯤 내 뜻대로 안되는 여행 해보는것도
여행을 돌아 볼수 있는 계기라고 봐요^^

"한번쯤"은 좋았던 거 같습니다. 다시는 경험하고 싶지 않지만요. ^^;

말을 하지 그랬어요?
심리의 묘사가 볼 만하네요.

그러게요. 제가 소심이라 말도 못하고 끙끙거렸네요. ㅎㅎㅎ
읽어주셔서 고맙습니다.

ㅎㅎㅎ
그 친구는 아직도 자기가 님을 배려했다고 생각할 거예요.
말을 해야 알더라고요.

토스토옙스키의 죄와 벌에서 주인공의 심리를 세밀하게 묘사한 것과 같은 느낌을 받았어요.

Posted using Partiko Android

아이고, 과찬이십니다.
이런 칭찬을 듣다니 정말 영광입니다!

한편의 로드무비같은 내용입니다.
장면 장면이 그려지는 것 같아요^^

저도 아직 머리 속에 생생하답니다.

재밌게 읽었어요.^^
다른건 몰라도 여행은 취향이 맞아야겠더라구요. 근데 3자 입장에서 보니 재밌네요.^^

맞아요. 취향이 맞아야 하는데..
저도 지금 돌아보니 재미있는 추억이긴 하네요. ^^

너무 재밌게 읽었어요. 저는 아무래도 친구분보다는 불이님쪽에 가까워서 불이님께 이입이 됩니다 (특히나 신세지는 걸 엄청나게 싫어해서...)
제가 계획한 것이 다 어그러지고 무엇보다도 걷고 싶었는데 다리아프다고 옆에서 불만불평하면 스트레스 받았겠어요.
결국엔 예상보다도 더 좋은 결과에 화를 낼 수도 없는 상황이라니 복잡한 심경이 짐작이 되요. 저는 제 삶을 돌아봤을 듯 ㅋ

원하는 걸 말하고 바로 행동하는 사람의 뜻대로 세상이 움직이는 것 같단 생각이 들어요.(이것이 끌어당김의 법칙일까요..)
친구분처럼 사는 삶은 어떤 삶일까 궁금해지기도 하네요. 불이님은 아마 함께 간접경험하지 않으셨을까.

지금은 웃으며 추억하는데 그땐 나름 심각했다죠. ㅎㅎㅎ
물론 나중엔 진짜 하느님이 쟬 사랑하시나 보다, 하고 약간 체념했지만요.

친구분의 여행 스타일이 ㅋㅋ 제 스타일이네요 ㅋㅋㅋㅋㅋㅋ
근데 저도 조용히 걷는 것도 좋아 하기도 해서 어쩌면 짬뽕 된것 같기도 하고 ㅎ...
스타일이라는게 안 맞으면 참 힘든 일인데, 일탈이라고 해서 한번 정도는 경험해 보지않은 것도 경험 해 보는 것도 좋지 않았을까요 ㅎㅎ 그 당시는 싫었을지 몰라도 어쩌면 내 삶에 다시 는 하기 힘든 경험일 수도 있으니깐요 ㅎㅎ 그래도 참 피곤 하셨겠네요 ㅎㅎㅎㅎ

소심해서 말도 못하고 혼자 끙끙거리고, 꽁해있다가, 일이 또 잘 풀리니까 이거 뭐야, 하다가..
혼자서 속으로만 생쑈했지요. ㅋㅋㅋ

글을 너무 재밌게 쓰셔서 술술 읽었네요. 역시 여행은 혼자가 진리... ㅠㅜ 하느님이 보우하사에서 빵터졌어요. 그분 어떻게 지내실지 궁금해요. ㅎㅎㅎ

지금은 멋진 커리어우먼으로 결혼해서 행복하게 잘 살고 있답니다. 여장부 스타일이에요. :)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 서울편 읽고 혼자 다녀온적이 있었어요 ㅎㅎㅎㅎ
유홍준 작가님 너무 좋아해서요! 강의듣고 흠뻑빠졌답니다.
저도 여행할때의 브리님이랑 비슷한 성향인거같아요 근데 어떨때는 친구분 성향인거같고 반반이네요 ~

서울편도 있었군요.
그 책 읽으면 진짜 막 여행 다니고 싶어지죠? ㅎㅎㅎ

그래도 이렇게 재밌는 추억거리가 생겼네요.ㅎㅎ 그래도 다시 함께 가라면 못할 것 같죠?^^

두번은 사양하고 싶습니다. ^^

의도했던 바와는 거리가 있었지만
일정은 무리 없이 진행 되었네요.
하느님께서 보우하시는 친구분 덕으로 ㅎㅎ

넵. 하느님께서 보우하시는 친구 덕에. ㅎㅎㅎ

마지막 멘트 ㅎㅎㅎㅎ 어딘가 공감되는 것 같아요. 누가 틀렸다고 할 수는 없고 각자의 호흡과 템포가 다른 건 어쩔 수 없는 것 같아요. 너무 달라도 너무 비슷해도 부딪히게 된다는 거 정말 공감해요. :)

맞아요. 틀렸다기 보다 다른 거죠.
그게 여행을 다니다 보니 다른 점이 더 부각된 거고요.
함께 여행을 다닌다는 건 참 큰 일이더라고요.

너무 재밌게 읽었습니다. 저렇게나 운수좋은 분과 함께하는 여행길이라니 쉬운 경험은 아니었을듯 해요.
불이님의 처음 계획과는 많이 달라진 여행이지만, 덕분에 저는 재미있는 글을 하나 읽을 수 있게 되었네요 :D

넵. 저도 좋은 추억을 갖게 되어서 좋아요. :)

이래서 사람들은 여행을 하나봅니다~
평소에는 생각지도 못한 행동과 경험을 하게 만드네요^^

맞아요. 평소에는 다르긴 해도 그걸 그리 크게 느끼지 못했는데, 여행을 다니다 보니 확실히 알겠더라고요.

@bree1042님은 여행을 통해 부처가 되셨다는 결말로 보이네요. ㅎㅎㅎ

불행히도 아직 득도를 하지 못했습니다. ㅎㅎㅎ

ㅎㅎ 평소 성향이 비슷하다고 생각했던 친구도 여행을 가보면 성향의 차이가 뚜렷해지더라구요. 전 고등학생 시절 베프와 강원도 여행을 갔었는데, 여행 내내 뭔가 서걱거리는 느낌이 있었어요. 그 생각이 나네요.
잼나게 잘 봤습니다^^

잠깐만 만나는 것과 하루 종일, 여러날을 붙어 지내는 것과 많이 다르다는 걸 깨달았어요.
하긴, 연애와 결혼도 그렇겠죠? ^^

ㅎㅎㅎㅎㅎ 목사님인 아버님께서 따님을 위해 열심히 기도하시나 봅니다.

Posted using Partiko iOS

그런가 봅니다. ^^

저도 친구와 같이 유럽간게 생각나네요.
별일 다있었는데 ㅎㅎ
재밌게 봤습니다!

역시 여행길에서는 온갖 에피소드가 다 생기는군요. ^^

Congratulations @bree1042! You have completed the following achievement on the Steem blockchain and have been rewarded with new badge(s) :

You made more than 27000 upvotes. Your next target is to reach 28000 upvotes.

You can view your badges on your Steem Board and compare to others on the Steem Ranking
If you no longer want to receive notifications, reply to this comment with the word STOP

Do not miss the last post from @steemitboard:

Are you a DrugWars early adopter? Benvenuto in famiglia!
Vote for @Steemitboard as a witness to get one more award and increased upvotes!

브리님의 글은 언제 봐도 최고입니다.

헤헷, 고맙습니다. ^^
요새 바빠서 일주일에 하나 쓰는 것도 벅차네요. T^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