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 어찌 웃는 날만 있겠는가(上)

in #kr6 years ago (edi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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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요일 햇볕


아들들 덕분에 주말 동안 웃었고, 화냈다. 좋을 때는 참으로 좋았다. 아닐 때에는 상당히 고단하였다. 아, 나는 행복하다.

10월 12일 어린이집 작은놈 반에서 ‘자녀와 함께하는 숲 체험’ 프로그램을 진행했다. 나는 몇주 전부터 이날을 학수고대했다. 작은놈을 오전 11시쯤 어린이집 인근 공원에서 만났다.

녀석은 자동차 진입을 방지하는 기둥을 붙들고 겨우 서 있었다. 놈은 아직 잘 걷지 못한다. 한 번에 스무 걸음이면 주저앉고 마는 수준이다.

나를 발견한 놈은 차마 걸음을 떼지는 못하고 왼발을 들었다 내렸다 하면서 애처로운 몸짓을 했다. 아, 내새끼 예쁘다.

나는 녀석을 안았다. 잘 웃는 놈이 도통 웃지 않았다. 보아하니 반수면 상태였다. 오전 11시는 녀석의 오침 시간이었던 것이다.

녀석의 콧물과 침으로 내 맨투맨 티셔츠가 엉망이 됐다. 그래도 좋았다. 평일 대낮에 놈을 안고 함께 볕을 쪼일 수 있다니. 음지가 추웠지만, 양지는 따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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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요일 데뚜


평소보다 일찍 큰놈을 어린이집에서 빼왔다. 요즘 하원이 늦어져 마음이 아팠었다. 선생님이 “OO아 아빠 오셨네”했다. 교실에서 뛰어나온 녀석이 “아빠 일찍 왔네”라며 웃었다.

우리는 버스를 타고 시내로 나갔다. 녀석은 대중교통을 타는 것을 좋아한다. 무슨 놀이쯤으로 생각하는 것 같다. 연인과 데이트하는 것처럼 나는 설렜다.

우리는 꽤 괜찮은 이탈리안 음식점에 갔다. 가는 길에 녀석은 “나 오렌지 주스랑, 김밥이랑, 핫도그 먹고 싶어”라고 말했다.

까만밥(먹물 리소토) 먹자고 겨우 꼬드겨 식당에 들어갔다. 녀석은 메뉴판 사진 속에 장식으로 들어간 사과를 가리키며 “사과 먹고 싶어”라고 했다.

엄마를 기다리며 리소토와 피자를 먼저 시켰다. 둘 다 맛본 녀석에게 “OO 뭐가 제일 맛있어?”라고 말했다. 녀석은 식전빵을 가리켰다. 아이고 의미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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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요일 2차


늦게 합류한 아내와 저녁을 먹고 둘째를 찾으러 처가댁으로 향했다. 도중에 장모님께 연락이 왔다. “XX이 잔다. 오늘 여기서 재워라.” 장모님 감사합니다.

나와 아내와 큰놈은 내가 애정하는 막걸릿집으로 방향을 틀었다. 큰놈에게 쭈쭈바 탱크보이를 하나 물려놓고, 우리 부부는 빠르게 잔을 비웠다. 신메뉴를 시키니까 신제품 약주 한 병을 내왔다.

이제 제법 모양이 잡힌 큰놈의 손에 약주병을 쥐여주었다. 그리고는 “자 이렇게 두 손으로 잡고, 한 손으로는 상표를 가리고. 옳지. 그 다음에 이렇게 따르는 거야.”

녀석이 따라준 술을 마셨다. 세상 어떤 명주보다도 맛있었다. 녀석이 아내의 잔에도 술을 따랐다. 내 잔과 아내의 잔과 녀석의 탱크보이로 건배했다. 아름다운 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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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왕.. 벌써 다 키우셨네 ㅎㅎㅎ

ㅋㅋㅋ 그러게 말입니다. 이제 초,중,고등학교 보내고 대학 보내고 취직하고 장가 가는 일만 남았네요!

여기까진 웃고 계시군요. ㅎㅎ

ㅋㅋㅋ 미련한 인간은 한치 앞을 보지 못하는데...

녀석은 식전빵을 가리켰다. 아, 의미 없다.
장모님 감사합니다.

ㅋㅋㅋ 귀여워요. 데뜨하는 설렘이 느껴지네요.
그나저나 벌써부터 주도 조기교육이신가요?

예. 이게 뭐라고 정말 설렜답니다.
짠은 더 어릴 때부터 해왔는데 ㅋ 술 따른 건 처음입니다. ㅋㅋㅋ

캬....진짜 명주 드셨네요.

킹조지, 발렌타인 30년 한 잔과도 바꾸지 않을 귀한 한 잔이었습니다 ㅎㅎ

아악 킹조지!!!!!
곧 꿈에 킹조지가 나타날것같아요...ㅋㅋ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입꼬리 승천 중 ㅋㅋㅋㅋ 숨길 수가 없군용 :)

저것이 그나마 덜 웃은 사진이옵니다 ㅋㅋㅋ

마지막 사진에 보검님 미소가 다했네요. :)

브리님, 정말 저때의 기분좋음은 숨길수가 없었답니다. 덕분에 술집에서 주접떨면서 놀았어요. 큰놈이 까르르 웃고 난리도 아녔답니다.

옆테이블 손님들 죄송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