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 역병이 휩쓸고 간 자리

in #kr7 years ago (edited)

역병이 우리 집에서 창궐했다. B형 독감이었다. 한낱 독감이 한낱 독감이 아니었다. 독감이 이렇게 무섭다는 사실을 전에는 미처 몰랐다.

아내는 오한과 근육통으로 몸져누웠다. 기침은 아내의 가슴 깊은 곳에서 터지듯 나왔다. 기침 소리가 낮고 거셌다. 아들들은 똥을 지렸다. 체온이 40도를 넘나들었다.

나만 혼자 멀쩡했다. 나라도 괜찮으니 불행 중 다행이라는 안도감과, 묘한 소외감이 교차했다. 독감 바이러스마저 ‘아비야 너는 나가 돈을 벌어 오거라’라고 말하는 것인가.

처음에는 그냥 감기인 줄 알았다. 주말이어서, 문을 연 아무 병원에 그냥 갔다. 아내는 B형 독감 판정을 받았다. 엄마가 B형 독감이면 모유를 먹는 둘째는 필연적으로 B형 독감일 것이었다. 엄마에게서 떨어지지 않으려는 첫째도 B형 독감이 확실했다.

B형 독감은 보통의 감기약으로는 낫지 않는다. 타미플루를 먹어야 한다. 아내는 약의 독성이 모유에 녹아 둘째의 몸에 흘러 들어갈까 봐 타미플루를 먹지 않았다. 타이레놀만 먹었다. 의사도 그러는 게 좋겠다고 했다. 그 의사가 뭘 좀 잘못 알고 있다는 것을 나중에야 알게 됐다.

첫날, 의사는 B형 독감은 발열 12시간 이후로 확진 가능하다고 했다. 첫째와 둘째 모두 미열이 있었으나, 병원에 갔을 당시에는 발열 12시간이 안 된 시점이었다. 일단 집에 돌아갔다.

첫째의 상태는 비교적 괜찮았다. B형 독감이 아닐 수도 있겠다는 헛된 희망을 품었었다. 생후 150일이 안 된 둘째의 몸에서 열이 계속 났다. 자꾸 설사했다. 이날 저녁에 둘째만 데리고 응급실에 갔다. 나쁜 예감은 좀처럼 틀리지 않는다. B형 독감이었다. 의사가 타미플루를 처방했다. 탈진을 예방하려고 수액을 놓았다. 찹쌀떡 같은 발에 주삿바늘을 꽂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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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째 날, 첫째의 체온이 39도를 넘었다. 눈이 풀렸다. 그래도 까르르 웃으면서 뛰어다녔다. 다리에 힘이 없어서 뛰다가 자꾸 넘어졌다. “아들 이리 와” 불러서 안아보면 숫제 불덩이였다. 역시 B형 독감이었다. 타미플루를 먹였다. 그래도 열이 떨어지지 않았다. 응급실에 가봤자 별 수가 없다. 나는 이것을 경험으로 알고 있었다. 첫째를 홀딱 벗겨 욕조에 넣었다.

첫째 B형 독감 판정은 원래 다니던 소아과에서 받았다. 이 병원의 의사는 대한모유수유의사회(이런 게 진짜로 있다!) 임원이다. 의사가 말했다. “수유부가 먹을 수 있는 감기약이 있다. 타미플루는 비교적 임신부·수유부에게 안전한 약이다. 수유 중에 먹어도 된다. 수유부가 타미플루 먹으면 안 된다고 한 병원이 어디냐. B형 독감을 방치하면 폐렴이 될 수도 있다. 여러 위험을 고려하면 타미플루를 먹는 게 낫다.”

아내와 아들들은 닷새쯤 약을 먹으면서 독감과 싸웠다. 아내의 기침은 거의 멎었다. 두 아들의 체온은 정상이다. 아직 조금 콜록거리고, 콧물을 줄줄 흘리기는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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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진짜 독감이 유행이더라구요...
저도 친구들 가족들 안걸린사람이 없습니다.
이런유행은 따르지않아도 참 좋을텐데 ㅜㅜ
그래도 아내분과 아드님들 상태가 많이 호전되서 다행입니다.
빠른쾌유빌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이제 거의 다 나은 듯 합니다. 독감이 이렇게 무서운 줄 이번에 처음 알았습니다.

에구. 애기들이 아파서 걱정이 많이 됐겠어요. 애들 열오를때가 제일 걱정인데. 의사가 진작에 바른 처방만 했으면 좋았을걸 ㅜㅜ. 그래도 체온이 돌아와서 다행이네요~

예 그래도 어른이나 좀 큰 아이들은 아프면 아프다고 하고 물도 먹고 약도 잘 먹는데, 갓난쟁이 아프니까 정말 어찌할 바를 모르겠더라고요. 열이 내려가서 참 다행입니다.

힘내십시오 작년 일주일 온 가족이 병원에서 살았네요. 아프고나면 애들이 훌쩍 커 있더군요

아프고 큰다더니 정말 큰애가 훌쩍 커버린 느낌입니다. 애들 자라는 거 보면 대견하면서도 아쉽달까요. 지금도 어리지만, 어릴 때 모습을 이제 못 보니까요.

전 저번달 A형독감으로 한달 고생했네요. 요즘에 B형이 유행이라 하더라구요. 그래도 요즘 독감은 약이나 주사만 맞으면 되서 다행이네요.

예 조선시대 같았으면 어땠을까 생각하면 아찔합니다. 의학기술이 발달해서 참 다행입니다.

아직 겪어보질 못했으나, 외롭고 참담했겠다. 이게 가장의 무게인가..

하지만 외롭고 참담할 시간이 별로 없습니다 ㅋㅋ 약먹이면 울고, 울면 달래고, 달래서 밥 먹이면 또 약먹을 시간....

고생하셨습니다 ㅠ 저도 작년에 독감 걸렸었는에 증세가 나은 이후에도 후유증이 꽤 길었던 기억이 납니다. 체력도 떨어지고 기침도 쉬이 나오고... 가족분들 잘 챙겨주세요.

나만 혼자 멀쩡했다.

프로필 사진을 보고선 금방 수긍했습니다. ㅎㅎ

어디 독감 따위가... 저 몸에...

ㅎㅎㅎ 아닙니다. 평소에는 감기 안 걸리는 체질은 아닌데 이상하게 이번만 비껴갔습니다. 제가 애들 걱정을 하도 하니까 아내가 좀 서운했나봅니다. 아내한테 더 신경써야겠습니다.

보내주신 것 잘 받았습니다. 감사합니다!!

저는 남편이 아프기만 해도 가슴이 쿵쿵 뛰는데 아이들이 아플 땐 얼마나 무서울 지 정말 상상할 수도 없어요.. 저 작은 발에 주사라니. 보기만 해도 아프네요.. 많이 좋아지셔서 다행이에요. :) 아빠라도 안 아파서 가족들이 의지하고 빨리 나을 수 있었던 게 아닐까요? ^-^

예 애들 아프면 정말... 특히 아기들은 혈관을 찾기 어려워서 주사바늘도 단박에 안 꽂힌답니다...

afinesword님이라도 안아파서 다행입니다. 허으... 요 몇년새 가족이 너무많이 아파서 병원에서 거의 살다싶이 했었다 보니 심정이 막 이해가 갑니다...

예 병원은 질색입니다. 병원 자주 오가셨다니 고생스러우셨겠어요. 아무쪼록 새해에는 병원 가실 일 없으셨으면 좋겠습니다.

제 주위에도 보니 진짜 이번겨울이 많이 춥고 공기도 계속 안좋아서 그런지 더 낫기가 힘든거 같드라구요..
애기들이 얼른 감기 나았으면 좋겠네요~

감사합니다. 거의 끝물입니다. 무탈하게 넘어가서 다행입니다.

혼자서 아픈 가족분들 돌보시느라 고생 많으셨네요.
아이가 아프면 엄마 탓인가 싶어서 엄마는 마음이 타들어갑니다. 아이들이 어리다니 더 그러셨을 겁니다. 내가 감기에 걸려 아이들도 고생하는구나 싶어서.. 아내분께 따뜻하게 한 마디 해주세요. :)

예... 아내는 자기가 아픈데도 애들부터 챙기더라고요. 어머니는 위대합니다. 아내에게 더 잘해야 하는데 말 뿐인 거 같아서, 늘 미안합니다.

아이구 어떻게 해요 ㅠ
저도 임신했을때 독감걸려봤는데
너무 힘들더라구요
애기들은 열은 안난다니 다행이네요
얼른 회복하시길바래요

감사합니다. 걱정해 주신 덕분에 아내와 아들들 모두 거의 다 나았습니다.

아고ㅠㅜ 가족분들의 빠른 쾌유바라겠습니다ㅠㅜ!!

감사합니다. 거의 다 나았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