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치지 못한 편지: 1년 만에 꺼내 보는 그 날의 일기

in #kr7 years ago (edited)

그날, 그녀와 한 달만에 다시 만난 날.
첫 인사는 다소 짧고 냉랭했다. 그동안의 분위기만큼이나.

우리는 말없이 걸었다.
카페까지 걷는 10분 남짓한 시간이 나에겐 그 어떤 시간보다 길게 느껴졌다.

그녀의 긴 머리를 질끈 묶은 리본 모양의 머리핀과
항상 인형을 달고 나왔던 주홍빛보단 빨간색에 가까웠던 핸드백,
좋아하던 핑크색 코트, 상아색 신발끈의 흰 운동화, 청바지.
그녀의 모습을 뒤에서 눈에 담았다.

다시는 못 볼 사람처럼.

카페까지 이어지는 길에는 피다 만 벚꽃이 가득했다.
해마다 그녀와 같이 보러가자고 해놓고서는 때를 놓치거나 했었는데..

카페에 도착했다.
그녀와 처음 찾은 카페였다.
왠지 다행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그녀와의 마지막 기억을 다시는 안 와도 될 공간에서 마무리를 짓는다는게.

나는 따뜻한 아메리카노, 그녀는 카페라떼를 주문했다.
그녀는 각자 계산하자고 했지만 내가 먼저 계산했다.

그리고 우리는 2층으로 올라갔다.
자리에 앉고서도 우리는 한참 아무 말이 없었다.
이윽고 진동벨이 울리고 난 머그잔에 담긴 커피를 가지고 돌아왔다.
그녀의 라떼 잔에는 눈치없는 직원이 하트를 그려놓았다.

자리에 앉고 다시 한참 아무 말이 없다가 마침내 그녀가 입을 열었다.
그녀가 나에게 왜 화가 났는지,
얼마나 서운했는지 구구절절 얘기를 하기 시작했다.
아 그녀는 이랬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동시에 항상 얘기했지만 닿지 않았던 것들..
그것들이 이제서야 조금씩 존재감을 드러냈다.

어느 정도는 예감했을지도 모른다.
그녀는 전 남자친구와 헤어진 일화도 거듭 얘기했었기에
자기만의 시간을, 자기만의 일상을 소중히 여긴다고 항상 말해왔기에

다 알고, 아니 다 알았다기에는 성급해보이지만..
어느 정도 알고 시작했지만 처음에는 이해해보려고도 했지만
그래도 힘에 겨운 건 사실이었다.

내가 준 사랑만큼은 기대하지 않더라도
어느 정도는 돌아오는 표현만큼은 기대했던게
그토록 큰 잘못이었을까..
사실 아직도 이 부분은 서운하고 아쉬운 부분이다.

그녀의 얘기가 끝났다.

이제 내가 말할 차례였다.

입을 열려고하니 어디서부터 어떻게 얘기해야 할지 전혀 떠오르지가 않았다.
그토록 연습하고 상상해왔던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눈 앞에 놓인 아메리카노만 벌컥벌컥 들이켰다.
그리고 입을 열었다.

그동안 내가 서운했던 것들.
사랑받고 있다는 느낌이 들지 않았다는 것부터,
네 옆자리에 굳이 내가 없어도 될 것 같다는 인상을 받은 그 일까지.

너는 왜 믿어주지 않느냐고 얘기를 했지만
이건 믿고 안믿고의 문제와는 또 다른 일이었다.
돌아오는 표현이 없기에 점점 지쳐갔고 상처받았으며 이내 포기해버렸다는 것을.

너도 내가 최근 들어 점점 놓아주는 것을 느꼈을 것이라고
하지만 넌 그걸 당연하게 여기면 안된다고
몇번이나 얘기했었노라고

'나는 원래 그래, 전 남친과도 그 문제 때문에 헤어졌어,
날 고치려고 하지 말아줘'
라는 말 뒤에 숨어서 얘기하는게 그토록 서운했노라고.
할 말은 다 마치지 못했는데 목이 메어와 입을 닫았다.

커피잔을 잡은 손이 떨려와 다른 손으로 떨리는 손을 꾹 눌러 잡았다.
앞에 앉은 그녀는 아까부터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그녀가 다시 입을 열었다.

미안하다고. 앞으로 주의하겠다고.

직감했다.
지금이 이 말을 꺼내야 할 타이밍이구나.
그토록 치열하게 고민하고, 망설이고, 아팠던 그 말을 입 밖으로 꺼낼 때라고.

그리고 그녀에게 말했다.

나는 더 이상 상처받고 싶지 않다고..
미안하지만 우리는 여기까지가 좋을 것 같다고.

그 말을 하는데 그동안 참았던 눈물이 뚝 흘러내렸다.
비겁해보일지도 모르지만
그제서야 계속 봇물이 터진듯 눈물이 나기 시작했다.

지금 이 순간을 후회할지도 모르겠다. 아니 후회할거다..
하지만 난 더 이상 견뎌낼 자신이 없다.. 미안하다..

그녀는 가만히 내 말을 듣고만 있다가 다시 말했다.

오빠가 그동안 날 기다려줘서 미안하다고..
자기에게 다시 한 번만 기회를 주면 안되겠냐고
이번엔 자기가 기다리겠다고...

그 순간에도 머리 속에서는 오만가지 생각이 스쳐지나갔다.

결정을 번복할까.
그녀가 변할 수 있을까.
다시 한 번만 믿어봐도 되지 않을까.
아니면 여기서 끝내야할까.

그녀에게 희망고문을 시키고 싶지 않았다.
그게 얼마나 힘든 일인지 알고 있었기에.
길었던 3년의 연애를 끝맺기 위해서는 지금이 낫지 않을까 생각했다.

그리고서는 가방을 들고 먼저 카페에서 일어났다.
그녀와 만난 많은 순간들 가운데
내가 먼저 자리에서 일어난 적은 처음이었다.
발걸음을 떼면서도 이 순간을 후회할 것 같았지만 어쩔 수가 없었다.
그녀를 위해서 그랬던 것이라고 변명할 생각은 없다.

단지 내가 너무 힘들었다.

그뿐이다..

집으로 돌아오는 버스 안에서 나도 모르게 계속 눈물이 흘렀다.
3년간의 추억이, 사랑이, 그녀가 내 볼을 타고 흘렀다.
누가 볼세라 부끄러워 채 떨어지기 전에 서둘러 닦아냈다.

그녀에게 연락이 왔다.

연락을 기다리겠다고.
하지만 아직도 난 그녀에게 연락하지 않았다.

그녀의 번호를 지우려고 핸드폰을 한참을 보고 있었지만,
결국 지우지 못했다.
아직은 내 마음에 크게 자리잡은 그녀가 덜 사라졌기 때문이리라.

하지만 연락해서는 안된다.
나를 위해서도, 그녀를 위해서도..

뜨거웠던 커피가 식어버렸다. 차디 차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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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정이입을 너무 하면서 읽어버렸습니다. 흑흑흑.

비슷한 경험이 있으신가요..? ㅎㅎ

아직 현재진행이라 차마 드립을 칠 수가 없군요...

아..ㅋㅋㅋ

지금으로부터 딱 1년 전의 일기를 꺼내봤어요.. 써놓고 다시 보는게 아파서 1년만에 열어봤는데 많이 희석된 것 같기도 합니다

날이 좋아서 기분좋게 지하철 타러 가던 중에 너 생각이 나서 괜히 목놓아 울었다. 그런 미친날들이 몇 번이고 몇 번이고 반복되고서야 괜찮다 말할 수 있었다. 비록 6개월은 훨씬 넘도록 힘들었지만 그래도 인정할 수 밖에 없었다.

“시간이 약이다”

확실히 시간이 흐르고나니 조금은 닳아 뭉툭해진 것 같은 느낌이 납니다

토닥토닥...
제가 다 울컥하네요

위로 감사합니다.. ㅎㅎ

소설을 읽는것 같아요!!!!!!
참 ... 연애를 하면서 서로가 사랑받고 있다는걸 느껴야 지속이 될텐데 ...
연애는 한사람이 한사람에게 맞추는게 아니고 서로가 불편함을 격더라고 같이 하는게 연애라고 생각합니다...

참 당연하다고 하면 당연한건데 어렵더라구요..

흑흑 인연이 아니었다고 생각해야죠 ㅠㅠ.......

그렇겠죠... 언젠가는 더 좋은 사람을 만날 수 있으리라 믿어봅니다

주륵.. 너무 슬프다 .. 공감되서인가요..

비슷한 경험이 있으시다면.. ㅎㅎ

연락해선 안되는 사이가 있지요. 전 그걸 못참아서 물리적인 방법을 이용해 지우고 차단하고 친구에게 휴대폰을 맡깁니다.
잡아 봤자 똑같을 사이임을 알았을때 울면서 쓴 곡이 있습니다.
살룬 유난의 ‘인연이 아니었다.’

노래를 찾아들었는데 멜로디와 가사가 가슴에 콕콕 꽂히네요..

정말 감정이입해버렸습니다..
너무 슬프네요

누구나 갖고 있을 법한 실연의 순간이겠지요..

음.... 아직도 못 지우셨나요??
그 분의 기다림은 아직도 계속 되고 있을까요??
지금은 치유되지 않았을까요??
그냥 좋은 기억으로 한번쯤 연락해 보는건 어떨까요??
봄바람도 살랑 살랑 불고.
나쁘게 헤어진게 아니라면 연락해 보는 것도 괜찮다 생각합니다.^_^
깊은 사이 아니더라도 좋은 인연 놓치는 것도 아쉽다고 생각하거든요.ㅎ

다시 연락할 용기가 아직은 없네요..
언젠가 우연히 마주친다면 모르지만 먼저 연락할 일은 앞으로도 없을 것 같아요.. ㅎㅎ

정말요?
현재진행인가요?
흠...위로해야하나요 응원해야 하나요.
둘 다!

제목에도 썼지만 1년 전 오늘의 일기였답니다..
위로와 응원 어느쪽이든 감사합니다 ^^

저도 비슷한 경험이 있지만 지금은 지금의남편과 잘 살고있습니다. 서로를 잘 이해해주고 알아주고 인정해주는 낭만님의 사람을 꼭 만날꺼예요. 댓글 쓰면서도 맴찢.. ㅠㅠ

지금은 많이 괜찮아졌어요, 위로 감사합니다 ㅎㅎ

이게 다 뭐예요 ;ㅁ; 왜때문에 내 마음까지 이렇게 아픈지. 남자쪽에 이입을 해 이별장면을 목격하고 공감하는 일은 처음인데.. 그 남자의 사정을 알게 되니 제 지난 일들도 스쳐지나가는군요. 그 말을 꺼내고 먼저 자리에서 일어나시기까지 얼마나 힘드셨을까요... 아무것도 애쓰지 말고, 그저 흘러가는대로 놓아두시면.. 알아서 제 자리를 찾지 않을까 합니다.

흘러가는대로.. 두다 보니 1년이 훌쩍 지났네요. 이제는 점차 앞으로 나갈 준비를 해보려구요 :)

흑... 눈물이 ㅠ.ㅠ
소설 읽듯이 읽어내려갔어요.
사랑받는 느낌을 받지 못하는 그 느낌적인 느낌이란 ㅜ 저 연애했을때가 급 생각났었어요...제 연애첫만남은 강렬했지만 연애기간동안은 나름 힘들었었거든요. 흗 ...

힘들었던 기간을 견디고 이제는 행복하시니 참 다행이네요 ㅎㅎ 항상 포스팅보며 부러움과 외로움을 동시에 느끼고 있답니다 ㅎㅎㅎ

앙금이 가득한 글이네요..
차디찬 커피가 님의 마음을 대변해주는 듯하네요..

“시간이 약이다”22
이 말을 남겨봅니다.

많은 분들의 위로와 공감 덕에 더 따뜻해지지 않았나 생각해봅니다 ㅎㅎㅎ